고영근의 표준중세국어문법론 '근대국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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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영근의 표준중세국어문법론 '근대국어'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80), 죠군령적지(君靈蹟
誌)(1881), 척아윤음(斥邪綸音)(1881), 화어유초(華語類抄)(간년 미상)
⑸ 문학 작품 자료
① 시조집 : 청구영언(靑丘永言)(김천택 엮음, 1728), 해동가요(海東歌謠)(김수장 엮음, 1763).
② 소설 : 방대한 양의 사본이 전하는데, 대부분 19세기 자료들이며 그 중 오랜 것은 18세기에 소급. 경판
본(京板本), 완판본(完板本) 등은 19세기 중엽 이후 것, 그 중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 소설들은
그 방언을 반영하는데,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도 이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③ 일기 :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순조 29-32년간), 계축일기(癸丑日記), 산성일기(山城日記) 등이 있는데,
이 중 의유당일기는 연대가 확실하고 내용이 정확하여 좋은 자료가 되며, 계축일기와 산성일기는
궁중 생활을 묘사하고 있어 그 특수어 자료로서 주목.
④ 신한첩(宸翰帖) : 숙휘공주(淑徽公主)에게 보낸 효종(孝宗), 인선왕후(仁宣王后), 현종(顯宗), 명성왕후(明
聖王后), 숙종(肅宗),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언간(言簡)을 모은 것. (김일근 소장)
⑹ 기타 자료
① 박성원(朴性源)의 화동정운통석운고(華東正韻通釋韻考)(1747), 홍계희(洪啓禧)의 삼운성휘(三韻聲彙)
(1751), 정조 명찬(命撰)의 규장전운(奎章全韻)(1796) 등의 운서(韻書)와 최석정(崔錫鼎)의 경세정운(經世正
韻)(1678),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1750), 황윤석(黃胤錫)의 이재유고(이齋遺藁)와 이
수신편(理藪新編)(영조 연간),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1824),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
(1819) 등은 한자음과 문자체계 및 국어의 음운, 어휘에 관한 소중한 자료.
② 일종의 백과사전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795)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헌종 연간) 등은 국어 및 문자 체계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포함.
③ 이두(吏讀)에 관한 문헌 :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 중 나려이두(羅麗吏讀), 구윤명(具允明)의
전율통보(典律通補), 저자 미상의 유서필지(儒胥必知) 등.
2. 문자 체계, 정서법
임진란 이전과 이후의 문헌들 사이에는 문자 체계와 정서법(正書法)에 판연한 차이가 나타난다. 국어 정서법이 가장 정제되었던 15세기 정서법이 차츰 깨어지다가 16세기 말엽에 이르러는 이미 그 전통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언어가 크게 변화하였고,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은 이전의 정서법 전통과 단절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정제되고 통일된 새로운 정서법이 다시 마련되지 않고 그 혼란 상태는 17세기를 거쳐 18, 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진다. 특히, 평민문학의 대두에 의한 문자 사용의 확대는 그것을 더욱 촉진하였다. 임진란 이전과 이후의 문헌 사이에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문자 체계상의 차이
① 방점(傍點)의 소멸 : 16세기 후반 일부 문헌에 이미 나타나고, 17세기 초엽부터 일반화.
② 의 소멸 : 이미 16세기에 종성에만 국한되어 ‘ㅇ’과 혼동되다가, 임진란 이후, 17세기 문헌에 간혹 ‘’
의 용례가 보인다고는 하나, 완전히 ‘ㅇ’에 합류. (‘ㅇ’이 위치에 따라 상이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현대와 동일한 상태에 도달)
③ 의 소멸 : 표기상으로는 16세기까지 근근히 유지되다가 17세기에 들어서 폐용. 17세기 문헌에 간혹
‘’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대개 동국신속삼강행실, 중간두시언해, 노걸대언해 등 중세국어 문
헌의 영향을 받은 책들에 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변화로 17세기 문자 체계는 사실상 25자 체계.
⑵ 정서법의 혼란
① 어두 합용병서의 혼란
첫째, 17세기에 들어 ‘, ’ 등이 소멸의 운명을 걷게 된다. ‘’의 이체(異體)로서 15, 16세기에 이미 ‘’
가 나타남에 이어 17세기 초에 ‘’가 등장하여 공존 상태를 형성하고, 같은 때에 ‘’도 ‘’의 이체로서 등
장. 그 예로 ‘뎌(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3.43), 디니라(同 4.29), 디니라(同 2.84), 려(同 충신도
1.46), 리오고(同 효자도 8.8), 려(同 6.44),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1.78), (同 효자도 1.34)’ 등이
보인다.
둘째, 동일한 된소리에 서로 다른 두 가지 표기가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 ’, ‘, ㅆ’ 표기의 혼동이 보
인다. ‘(意)’이 ‘’(중간두시언해 3.49, 7.11, 7.24 등)으로 나타난 예들을 제외하면,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그 예로 나셔(첩해신어 5.3), 나셔(同 5.11), , 쑥(艾, 박통사언해 上 35), 고(使, 同
下 28), 씀이(同 中 2) 등이 있으며, 이 혼동은 18세기에 이르러 극심해진다. 여기에 각자병서가 일부 부활
되어 사용된 여(挺,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3.9), 빼여(同 열녀도), 리(권념요록 6), 리(중간두시언해
4.15) 등의 예가 있으므로, 사실상 된소리는 세 가지 표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된소리 표
기는 19세기에 들어와서 ‘, , , ’ 등의 예처럼 모두 된시옷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그러나
‘ㅅ’의 된소리는 ‘ㅆ’이 아니라 ‘’으로 통용)
셋째, ‘’이란 특기할 만한 표기가 나타난다. 15세기 중엽의 ‘-(引)’의 표기는 각자병서가 폐지된 원각경
언해(圓覺經諺解) 이후의 문헌에서는 ‘혀-’로 표기된다. 그것이 16세기 말까지 계속되다가 17세기에 와서
‘’라는 표기가 나타난 것이다. 그 예로는 ‘화를 (彎弓, 동국신속삼강행실 열녀도 4.70), 법을 (引法, 경
민편언해 序 3), 나 (引我, 연병지남 9)’ 등이 보인다.
② 종성 ‘ㅅ’과 ‘ㄷ’의 혼란
15세기에 엄격히 구별되었던 것이 16세기 후반에 무너져 17세기에 들어서는 받침 ‘ㅅ’과 ‘ㄷ’의 선택은 지극
히 자의적이었다. 그 예로는 굳고(固, 두창집요 上 34), 굿거든(同 下 217); 묻고(問, 권념요록 3), 뭇디(첩해
신어 1.9); 맛(味,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4.30), 맏(同 효자도 1.36); 못(池, 권념요록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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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24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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