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
2. 작가의식
2.1. 민풍교화 관료의식
2.2. 위민적 비판의식
2.3. 순수지향에의 의지
3. 이세보의 작품 세계
3.1. 애정 시조
3.2. 현실비판 시조
4.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Ⅱ. 본론
1.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
2. 작가의식
2.1. 민풍교화 관료의식
2.2. 위민적 비판의식
2.3. 순수지향에의 의지
3. 이세보의 작품 세계
3.1. 애정 시조
3.2. 현실비판 시조
4. 문학사적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된 일련의 저작물을 보아 시조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조가 459수 진동혁 교수가 이세보의 새로운 시조집을 발견했는 바 (『별풍아(別風雅)』), 이 시조집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시조 한 수가 있으므로 이세보의 시조는 현재까지 459수가 발견되었다. 진동혁, 「새로 발굴된 李世輔의 時調集 <別風雅>에 대하여」, 『金英培先生回甲紀念論叢』, 형설 출판사, 1991.
그에 관해 전해오는 자료는 그의 시조집인 풍아 외에 많은 수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시세계는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연구되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의의를 고찰할 필요성이 큰 바이다.
고로 본고에서는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을 개관한 뒤, 그의 시조 창작에 있어서의 작가의식을 살펴보고, 그의 시집 『풍아』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검토할 것이다.
Ⅱ. 본론
1.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
이세보(李世輔)는 조선 후기의 문관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시조작가이다. 우리 시조문학사에서 이세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새삼 거론한다는 것은 요컨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조선조의 마지막 시조 작가로서 그로 인해 이정보(李鼎輔)를 끝으로 조선조의 시조가 종말을 고했다는 통설이 수정되었다.
또한 기존의 연구 상 가장 많은 편수를 남겼다고 알려져 온 안민영(182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다작(462수)만으로도 이미 그는 시가문학사(詩歌文學史)에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우뚝 서있다. 옛 선비들이 생활 속에서 많은 양의 한시(漢詩)를 남긴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으나 사대부로서 국문시가인 시조를 그렇듯 많이 남긴 경우는 이세보가 유일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는 그가 시조창작을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그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가 그가 다루었던 다양한 질료와 주제 면이다. 자기 시대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걱정한 시조를 비롯하여 유배애정도덕기행유람유흥농사 그 밖의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길이 닿은 것은 모두 시조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시계(視界)는 다양했다. 이를 두고 많은 작품을 짓다보니 관심을 둔 곳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넓은 시야를 가졌다보니 그렇게 해서 읊은 노래들이 집적되어 이렇듯 방대한 양의 작품이 생산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옳을 것이다. 그의 시조집에는 『풍아(風雅)』, 『시가(詩歌)』 등이 있다.
그의 신분과 관련된 생애적 측면을 살펴보자. 이세보는 아버지 전주이씨 단화(端和)와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좌보(左甫)이고, 호(號)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조선 왕실가문의 후예이나 세대가 거듭되면서 이세보의 조부代에 와서는 왕실과 멀어져 그나마 유지되던 벼슬도 끊긴 상태가 되었다가 후에 풍계군 당(豊溪君 塘)의 후사가 되면서 철종의 제종제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19세인 1851년(철종 2) 풍계군 당의 후사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소의대부 종2품 경평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21세에는 현론대부 정1품이 되어 철종의 수라상을 감선하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60년(철종 11)에 철종의 신임 받는 측근 신하로 당시 세도정치의 실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일파의 왕족 견제 대상의 표적이 되어 강진현의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석방되어 3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후 1865년(고종 2)에는 부총관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생을 마감 하던 1894년까지 때까지 그는 여주목사, 도총관,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 등을 지내며, 순탄한 관직 생활을 영위했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함께 그의 작품들은 때를 같이 하여 여러 장르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의 시조를 연구함에 있어 그의 생애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작가의식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도합 458수라는 다량의 작품을 창작해낸 사실을 놓고 볼 때, 그는 시조를 짓는 일을 전문적인 창작행위로 인식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현실비판유배애정도덕기행월령체계고유람농사 등 아홉 갈래로 분류되는 진동혁, 『이세보시조연구』, 집문당, 1983.
그의 시세계 역시 전문적인 시조 시인 또는 넓은 의미의 가객으로서의 이세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종래 사대부 시조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시여(詩餘)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야와 관심의 폭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렇듯 좁고 한정적인 시계를 그가 확대시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 자신이 전문적인 시조시인이나 가객으로 자임하면서 진술하고 노래하였다는 점 박노준, 「이세보의 애정시조의 특질과 그 시조사적 위상」, (『어문논집』, 제33권), 민족어문학회, 1994.
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세보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고급 관료, 심지어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조는 관념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경향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조선조 관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흥미로운 일로 그의 작가 의식을 궁금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의 작가의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김준옥, 「이세보 시조에 나타난 작가 의식과 그 문학적 의의」, (『국어문학』, 제34권), 국어문학회, 1999.을 참조하였음
2.1. 민풍교화 관료의식
이세보의 시조에서도 역시 조선조 관료들의 시조가 가지고 있는 민풍교화의 효용론적 경향이 나타난다. 원래 시조는 시로 보든 노래로 보든 관료들로부터 시작된 장르였다. 조선조 관료들의 이론으로 무장한 주자학에 그 정교의 이념을 두었던 탓에, 문학도 그 이념의 구현에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조선조 말기에도 여전하였다.
선비들은 문(文)을 통해 도(道)를 구현하려는 가장 적의한 단서는 ‘경(經)’이라고 믿었다. 이세보 역시 그랬다.
불원텬 불우인은 고금을 경계시라
실 모른 학업 업고 학업 못헌 군 업다
엇지타 이 셩경현젼의 이
그에 관해 전해오는 자료는 그의 시조집인 풍아 외에 많은 수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시세계는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연구되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의의를 고찰할 필요성이 큰 바이다.
고로 본고에서는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을 개관한 뒤, 그의 시조 창작에 있어서의 작가의식을 살펴보고, 그의 시집 『풍아』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검토할 것이다.
Ⅱ. 본론
1. 이세보의 생애와 업적
이세보(李世輔)는 조선 후기의 문관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시조작가이다. 우리 시조문학사에서 이세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새삼 거론한다는 것은 요컨대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조선조의 마지막 시조 작가로서 그로 인해 이정보(李鼎輔)를 끝으로 조선조의 시조가 종말을 고했다는 통설이 수정되었다.
또한 기존의 연구 상 가장 많은 편수를 남겼다고 알려져 온 안민영(182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다작(462수)만으로도 이미 그는 시가문학사(詩歌文學史)에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우뚝 서있다. 옛 선비들이 생활 속에서 많은 양의 한시(漢詩)를 남긴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으나 사대부로서 국문시가인 시조를 그렇듯 많이 남긴 경우는 이세보가 유일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이는 그가 시조창작을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그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가 그가 다루었던 다양한 질료와 주제 면이다. 자기 시대와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걱정한 시조를 비롯하여 유배애정도덕기행유람유흥농사 그 밖의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길이 닿은 것은 모두 시조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고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시계(視界)는 다양했다. 이를 두고 많은 작품을 짓다보니 관심을 둔 곳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넓은 시야를 가졌다보니 그렇게 해서 읊은 노래들이 집적되어 이렇듯 방대한 양의 작품이 생산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옳을 것이다. 그의 시조집에는 『풍아(風雅)』, 『시가(詩歌)』 등이 있다.
그의 신분과 관련된 생애적 측면을 살펴보자. 이세보는 아버지 전주이씨 단화(端和)와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좌보(左甫)이고, 호(號)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조선 왕실가문의 후예이나 세대가 거듭되면서 이세보의 조부代에 와서는 왕실과 멀어져 그나마 유지되던 벼슬도 끊긴 상태가 되었다가 후에 풍계군 당(豊溪君 塘)의 후사가 되면서 철종의 제종제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19세인 1851년(철종 2) 풍계군 당의 후사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소의대부 종2품 경평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21세에는 현론대부 정1품이 되어 철종의 수라상을 감선하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60년(철종 11)에 철종의 신임 받는 측근 신하로 당시 세도정치의 실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일파의 왕족 견제 대상의 표적이 되어 강진현의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석방되어 3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후 1865년(고종 2)에는 부총관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생을 마감 하던 1894년까지 때까지 그는 여주목사, 도총관,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 등을 지내며, 순탄한 관직 생활을 영위했다. 이러한 그의 생애와 함께 그의 작품들은 때를 같이 하여 여러 장르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의 시조를 연구함에 있어 그의 생애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작가의식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도합 458수라는 다량의 작품을 창작해낸 사실을 놓고 볼 때, 그는 시조를 짓는 일을 전문적인 창작행위로 인식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현실비판유배애정도덕기행월령체계고유람농사 등 아홉 갈래로 분류되는 진동혁, 『이세보시조연구』, 집문당, 1983.
그의 시세계 역시 전문적인 시조 시인 또는 넓은 의미의 가객으로서의 이세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종래 사대부 시조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시여(詩餘)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야와 관심의 폭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렇듯 좁고 한정적인 시계를 그가 확대시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 자신이 전문적인 시조시인이나 가객으로 자임하면서 진술하고 노래하였다는 점 박노준, 「이세보의 애정시조의 특질과 그 시조사적 위상」, (『어문논집』, 제33권), 민족어문학회, 1994.
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세보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고급 관료, 심지어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조는 관념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경향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조선조 관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흥미로운 일로 그의 작가 의식을 궁금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의 작가의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김준옥, 「이세보 시조에 나타난 작가 의식과 그 문학적 의의」, (『국어문학』, 제34권), 국어문학회, 1999.을 참조하였음
2.1. 민풍교화 관료의식
이세보의 시조에서도 역시 조선조 관료들의 시조가 가지고 있는 민풍교화의 효용론적 경향이 나타난다. 원래 시조는 시로 보든 노래로 보든 관료들로부터 시작된 장르였다. 조선조 관료들의 이론으로 무장한 주자학에 그 정교의 이념을 두었던 탓에, 문학도 그 이념의 구현에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조선조 말기에도 여전하였다.
선비들은 문(文)을 통해 도(道)를 구현하려는 가장 적의한 단서는 ‘경(經)’이라고 믿었다. 이세보 역시 그랬다.
불원텬 불우인은 고금을 경계시라
실 모른 학업 업고 학업 못헌 군 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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