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는 아빙극단에서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뎠지만 20세기 초기의 영국 산업연극에서는 자유롭게 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럽 대륙에서 정주하였다. 그리고 긴 생애의 대부분을 그것에서 보내면서 배우의 자기 중심적인 버릇과 그가 우매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연기의 무능, 보통 일반장치가의 미숙 등을 상대로 싸웠다. 요컨대 그의 방법은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조명을 변화시킨 일련의 커다란 스크린을 배경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서 2,3개의 이동 가능한 연단과 계단이 이용되었고, 예를 들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가 노린 듯한 압도적인 리얼리즘 열기에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무대배경을 만들어냈다. 원래 100년 전에 세워진 극장이라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만, 20세기 초의 일반적인 무대에서 이 정도로 신선했던 것은 일찍이 없었다. 연극이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전위적인 생각과는 언제나 조화되지 않는 견고한 건축물 속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고통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크레이그는 다음과 같은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 『극장에는 자기 자신을 통솔하려는 듯한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즉 혼자서 희곡을 만들고, 익살을 부리고, 배경과 의상 양쪽의 구성을 디자인하고, 그 위에 감독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 필요한 음악을 작곡하고, 필요한 기계장치와 사용되는 조명을 고안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는 처음부터 다시 한번 극장의 건물을 재계획하고, 배우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이츠와 같은 극작가와 마찬가지로 크레이그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도 영향을 준 연극의 한 형식은 극동연극이었다. 극동연극의 기원은 근대 유럽에서 이해하고 있는 최고의 연극표현보다도 더욱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세기 말까지 사실상 알지 못하였다.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연극 그 자체가 아니라 여행자의 설명과 아더 웨일리와 같은 학자에 의한 몇몇 연극대본 번역에서 였다. 19세기의 혼란한 무대를 정리하고 싶어 했던 개혁자들은 그 외견의 단순함과 - 일본과 중국의 무대는 대단히 복잡하였기 때문에 오해하여 -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으로 유럽의 무대장치가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막힌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상징주의에 매혹되었다.
유럽의 정신이 극동연극의 전통적인, 또한 의식으로서의 요소의 순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누구라도 극찬할 만한 많은 것이 거기에 있었다. 특히 흥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상징적인 무대장치와 지극히 아름다운 의상 - 의상에서는 직물의 모든 색과 이음새, 그 겹쳐져서 만나는 곳이 하나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 게다가 배우들의 믿을 수 없으리만큼 예술을 향한 길로의 정진이다. 손·발·신체 움직임의 어느 하나에 이르는 곳마다 거의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든 엄격한 훈련에 의해 어릴 때부터 단련되어 있다.
8. 근대와 현대의 연극
근대연극의 주류는 시민극이 주도했고 거기에 낭만주의가 가세함으로써 연극의 급격한 근대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근대 시민사회의 태동은 연극에도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을 선도한 계몽주의 사조와 더불어 특권층도 서민도 아닌 제3계급, 즉 시민을 위한 새로운 연극 형식이 모색되어 왔고, 영국도 초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에 흥미를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변화에 부응하여 연극형태가 굳어지기에는 시대적 ·사회적 변천이 지나치게 급격했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굳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연극이 그 전형적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 사조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극작가를 낳지 못했고, 오히려 형성기의 새 사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서 낭만적 사극과 병행하여 대중적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 중엽에 유럽 연극계를 휩쓴 ‘잘 꾸며진 연극’은 시민생활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꾸며놓은 극 진행 방식을 통해 정서의 인위적 소모를 유도하는 데 능했고 연극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을 연극에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연극의 사회적 타락을 자초한 상황 속에서 진실로 시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연극의 출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연극은 무엇보다도 낡은 형식과 관행의 전적인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첫 신호가 1887년 파리에서 생겨난 ‘자유극장’이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운동으로 번져 89년에 베를린에서 ‘자유민중무대’로, 91년에 런던에서 ‘독립극장’으로, 98년에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예술극장’으로 즉 일상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연극이 기조이기는 하지만 20세기 유럽연극은 그 기조를 수정 ·보완하거나 거기에서 탈피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특징이다. 따라서 현대극은 획일성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에 항거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동시대적 문제의식에 민감하고 유럽 문명의 위기감을 재빨리 반영시키는 데 있어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형태보다도 민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감성은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를 비롯한 많은 연극지도자들로 하여금 연극을 ‘동시대적 인식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표현주의 연극이나 브레히트가 실천한 서사연극,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부조리 연극이 모두 현대를 첨예하게 인식한 끝에 나온 연극의 자기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G.B.쇼, 미국의 E.오닐, 이탈리아의 피란델로, 독일의 브레히트, 프랑스의 S.베케트 등은 모두가 ‘사상가로서의 극작가’이고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 메이어 홀드, 독일의 라인하르트, 프랑스의 아르토, 영국의 크레이그 등은 연기나 연출 또는 무대미술의 대가인 동시에 연극 그 자체에 대변혁을 가져온 예지자들이기도 했다.
현대에 가장 깊이 절망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 바로 현대의 서양연극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전통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내는 데 여념이 없다
예이츠와 같은 극작가와 마찬가지로 크레이그와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도 영향을 준 연극의 한 형식은 극동연극이었다. 극동연극의 기원은 근대 유럽에서 이해하고 있는 최고의 연극표현보다도 더욱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세기 말까지 사실상 알지 못하였다.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연극 그 자체가 아니라 여행자의 설명과 아더 웨일리와 같은 학자에 의한 몇몇 연극대본 번역에서 였다. 19세기의 혼란한 무대를 정리하고 싶어 했던 개혁자들은 그 외견의 단순함과 - 일본과 중국의 무대는 대단히 복잡하였기 때문에 오해하여 - 리얼리즘에 대한 반동으로 유럽의 무대장치가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막힌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상징주의에 매혹되었다.
유럽의 정신이 극동연극의 전통적인, 또한 의식으로서의 요소의 순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누구라도 극찬할 만한 많은 것이 거기에 있었다. 특히 흥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상징적인 무대장치와 지극히 아름다운 의상 - 의상에서는 직물의 모든 색과 이음새, 그 겹쳐져서 만나는 곳이 하나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 게다가 배우들의 믿을 수 없으리만큼 예술을 향한 길로의 정진이다. 손·발·신체 움직임의 어느 하나에 이르는 곳마다 거의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든 엄격한 훈련에 의해 어릴 때부터 단련되어 있다.
8. 근대와 현대의 연극
근대연극의 주류는 시민극이 주도했고 거기에 낭만주의가 가세함으로써 연극의 급격한 근대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근대 시민사회의 태동은 연극에도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을 선도한 계몽주의 사조와 더불어 특권층도 서민도 아닌 제3계급, 즉 시민을 위한 새로운 연극 형식이 모색되어 왔고, 영국도 초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에 흥미를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변화에 부응하여 연극형태가 굳어지기에는 시대적 ·사회적 변천이 지나치게 급격했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굳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연극이 그 전형적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19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낭만주의 사조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극작가를 낳지 못했고, 오히려 형성기의 새 사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서 낭만적 사극과 병행하여 대중적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19세기 중엽에 유럽 연극계를 휩쓴 ‘잘 꾸며진 연극’은 시민생활을 빙자하여 교묘하게 꾸며놓은 극 진행 방식을 통해 정서의 인위적 소모를 유도하는 데 능했고 연극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을 연극에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연극의 사회적 타락을 자초한 상황 속에서 진실로 시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연극의 출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연극은 무엇보다도 낡은 형식과 관행의 전적인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첫 신호가 1887년 파리에서 생겨난 ‘자유극장’이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운동으로 번져 89년에 베를린에서 ‘자유민중무대’로, 91년에 런던에서 ‘독립극장’으로, 98년에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예술극장’으로 즉 일상현실의 재현으로서의 연극이 기조이기는 하지만 20세기 유럽연극은 그 기조를 수정 ·보완하거나 거기에서 탈피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특징이다. 따라서 현대극은 획일성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에 항거하면서 시대정신을 반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동시대적 문제의식에 민감하고 유럽 문명의 위기감을 재빨리 반영시키는 데 있어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형태보다도 민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감성은 극작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를 비롯한 많은 연극지도자들로 하여금 연극을 ‘동시대적 인식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표현주의 연극이나 브레히트가 실천한 서사연극,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부조리 연극이 모두 현대를 첨예하게 인식한 끝에 나온 연극의 자기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G.B.쇼, 미국의 E.오닐, 이탈리아의 피란델로, 독일의 브레히트, 프랑스의 S.베케트 등은 모두가 ‘사상가로서의 극작가’이고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 메이어 홀드, 독일의 라인하르트, 프랑스의 아르토, 영국의 크레이그 등은 연기나 연출 또는 무대미술의 대가인 동시에 연극 그 자체에 대변혁을 가져온 예지자들이기도 했다.
현대에 가장 깊이 절망하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것이 바로 현대의 서양연극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전통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내는 데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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