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재필과 독립신문
2. 일장기 말소사건
3.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4.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5. 동아일보 백지사태
6.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2. 일장기 말소사건
3.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4.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
5. 동아일보 백지사태
6.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본문내용
[코리아헤럴드]에 흡수. ③ '1도(道) 1지(紙) 원칙' 하에 대구의 [영남일보]가 [대구매일신문]에 흡수, 부산의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흡수 경남 진주에서 발행되던 [경남일보]가 마산에서 발행되던 [경남매일신문]에 흡수(후세 [경남신문]으로 개제), 광주의 [전남매일신문]이 [전남일보]에 흡수(후에 [광주일보]로 개제)④ 통신은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합병, 연합통신으로 발족하였으며, 기타 시사·경제·산업 등 군소 통신사는 문을 닫았다. ⑤ 방송은 민영 방송을 폐지하고 공영 방송 체계로 바꾸어 KBS와 MBC 두 채널로 이원화시켰는데, [중앙일보]의 자매 방송인 동양방송(TBC)은 KBS에 통합시키고. [동아일보]의 자매 방송인 동아방송(DBC) 역시 KBS에 통합되었다. 기독교방송은 보도 요원은 모두 KBS에 통합되고 선교 방송만 허락되었다. 민영방송으로 최고의 시청률을 내고 있던 TBC 직원들은 그 억울함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 당시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진행했던 황인용씨가 그 당시 분위기를 얘기했다.언론통폐합 이전에도 군부는 박정희와 같이 보도지침을 마련해 언론을 통제했다. 그래서 날마다 각 신문사 편집국장들은 서울시청 3층에 가판을 들고가 검열필 인증을 받아야 했다. 군데군데 빈 공간으로 신문이 찍혀 나갔던 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검열하는 신군부의 통제 때문이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건 하달되는 보도지침을 통해 일선 기자들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기자들도 몰랐던 사실이 보도통제 사안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가 발표되고 5월 20일 기자들이 언론보도지침을 거부하는 입장을 밝힌다. 신군부는 이러한 기자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가차없이 제압했다. 저항을 주도한 기자들은 용공혐의나 광주관련 유언비어 살포등의 이유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신군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기자들은 점차 회사에서 해직을 당한다. 사퇴를 노골적으로 강요했으면서도 자의로 회사를 떠나는 것처럼 사직서를 받았는데 이것은 정부에서 하달한 지침이었다고 한다. 당시 해직을 권고당했던 기자들도 이러한 인사조치 방법에까지 신군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언론사마다 기자들의 성향을 파악해서 보고하는 내부조력자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론통폐합과는 별개로 사주가 그 전부터 쫓아내고 싶던 사람들(하달받은 명단에 없는)을 끼워서 해직시켰다는 점이다. 사주들이 자기 맘대로 언론을 휘두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들은 해직되면 바로 생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지만 사주들은 부당하게 자신의 사업권을 제한당했던 것이지 기자들처럼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하겠다. 단순 피해자 그 이상으로 평가 할 수는 없지 않나 싶다.(이 부분은 제 생각입니다) 그 후로 언론통폐합을 거치면서 1000명이 넘는 기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군부와 언론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기자들은 이제 전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돼버렸다. 여기에는 기자들의 대우가 그 당시 제일 돈을 많이 주던 종합상사보다 더 나아졌다는 것도 한 이유다. (40만원에서 80만원으로 2배가 됐다고 합니다.)즉 당근과 채찍을 구사해 기자들이 자기들의 현실에 안주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점차 기득권의식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었다.이렇게 신군부와 사주의 입맛에 따라 걸러진 기자들은 5공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권언유착의 문화를 형성해 왔다. 언론탄압이 강해질 때마다 정치권에 흡수되는 언론인이 많았다는 통계는 권력의 언론장악능력과 관련해 여러가지를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