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가 적용됨으로 원죄의 죄책에서 씻김을 받는다. 더 나아가 그는 말하기를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으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하며, 모든 생활이 성숙하게 자란다. 이런 혜택들은 세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2) 세례에 의한 중생이 뜻하는 것과 그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
웨슬레에게 있어 세례라는 것은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곧 세례는 세례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곧 중생과 세례받은 사람의 생애 전체 곧 성화의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산 관계를 통하여 성장하며 마침내는 완성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결국 웨슬레의 중심적인 관심과 강조는 세례가 갖는 이 발전적인 성격과 세례받은 사람이 그가 언제 세례를 받았든지간에 현재 여기에서의 책임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웨슬레는 성인의 세례에 관하여는 좀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유아세례는 “하나의 의롭게 하고 중새하게 하는 성례전”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세례받았다고 해서 모두 거듭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신생의 사건이 세례와 동시에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회개하고 믿어야만 한다. 웨슬레는 가톨릭적 요소(유아의 세례에 의한 중생)와 복음적 이해(성인의 복음적 회심을 위한 산 믿음의 강조)의 양자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아세례: 믿음과 세례의 관계
유아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야 믿음이 가능한 것이다. 웨슬레에 있어서 수 세자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세례 이후의 믿음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받은 유아는 이런 의미에서 곧 수세 후에 따르는 믿음에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례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주로 세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세례받은 유아에게 요구되는 신앙이라는 전제 조건을 웨슬레는 그 어린이 대신 그 유아를 세례받게 함으로 바치는 부모에게서 찾았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이다. 비록 그 부모의 믿음이 유아를 대신한 대리적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부모의 믿음은 특수한 방법으로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의 일면은 할례와 세례의 균형관계에서부터 나왔다. 웨슬레는 세례를 할례 대신 주어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솔선하여 이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세례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규례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 유아 세례가 단순한 인간들에 의한 헌아식이라는 뜻만으로는 해석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4) 웨슬레의 구원론적 구조에서 본 세례관
웨슬레에게 있어서 세례란 사건(중생을 낳게 하는) 이요, 또는 과정(새로운 삶의 성장이 강조된 -성화)으로 이해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이같이 세례는 기독자 생활 전체, 곧 의인, 중생, 성결을 망라한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관심은 후자, 곧 세례에 있어서 의 과정의 차원에 있었다. 웨슬레에 있어서 세례는 신자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그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례를 이해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성결에 대한 웨슬레의 주관 관심이 세례관에는 올바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 세례관을 “복음적 신인협동설”로 표현되는 그의 신학적 구조에 밀접하게 평형시키면서 전개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웨슬레 신학의 전체적인 체계에 가장 일관성 있는 것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연합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찾는 데 있다. 그의 “세례에 의한 중생”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변화”이다. 곧 유아(혹은 성인)들이 은혜의 왕국, 곧 교회 안으로 옮겨지는 관계의 변화를 말한다. 이것은 세례에 의한 거듭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세례로 말미암은 중생은, “그리스도 교회의 몸 안에 접붙여졌다. 곧 하나님의 양자 삼으심과 은혜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혜의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신자들의 몸으로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고교회적 교회관에서 볼 때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편입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례가 베풀어지는 바로 그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약속되어진 곳이요,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총)을 받으며 세례를 받은 신자가 성장하여 마침내는 영혼의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의미를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될 때, 세례란 교회가 중요하게 합동적으로 시행하는 행위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례는 교회가 어떤 사람을 구별하여 세례받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은혜의 왕국 안으로 편입시켜, 객관적으로 이미 주어진 바 된 구속의 복음(이미 주어진 선재은혜 그리고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의인의 은혜와 성결의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거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세례는 “행위의 케리그마” 또는 “복음의 성례전”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세례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은 세례(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만 세례에서 선포되고 약속된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받으며, 그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웨슬레 자신이 이해했던 것처럼 만약 세례받음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의미에서 거듭나 내적 변화와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낮은 의미에서 거듭나 겨우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세례받은 사람의 믿음의 정도에 상관되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세례에 의한 중생이 뜻하는 것과 그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
웨슬레에게 있어 세례라는 것은 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곧 세례는 세례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곧 중생과 세례받은 사람의 생애 전체 곧 성화의 양자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산 관계를 통하여 성장하며 마침내는 완성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결국 웨슬레의 중심적인 관심과 강조는 세례가 갖는 이 발전적인 성격과 세례받은 사람이 그가 언제 세례를 받았든지간에 현재 여기에서의 책임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웨슬레는 성인의 세례에 관하여는 좀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유아세례는 “하나의 의롭게 하고 중새하게 하는 성례전”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세례받았다고 해서 모두 거듭난 것은 아니다. 만약에 신생의 사건이 세례와 동시에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회개하고 믿어야만 한다. 웨슬레는 가톨릭적 요소(유아의 세례에 의한 중생)와 복음적 이해(성인의 복음적 회심을 위한 산 믿음의 강조)의 양자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아세례: 믿음과 세례의 관계
유아들은 세례를 받은 후에야 믿음이 가능한 것이다. 웨슬레에 있어서 수 세자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세례 이후의 믿음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받은 유아는 이런 의미에서 곧 수세 후에 따르는 믿음에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례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주로 세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세례받은 유아에게 요구되는 신앙이라는 전제 조건을 웨슬레는 그 어린이 대신 그 유아를 세례받게 함으로 바치는 부모에게서 찾았다. 여기에서 강조된 것은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이다. 비록 그 부모의 믿음이 유아를 대신한 대리적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부모의 믿음은 특수한 방법으로 믿는 공동체의 공동신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의 일면은 할례와 세례의 균형관계에서부터 나왔다. 웨슬레는 세례를 할례 대신 주어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유아세례는 주님이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솔선하여 이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세례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규례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 유아 세례가 단순한 인간들에 의한 헌아식이라는 뜻만으로는 해석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4) 웨슬레의 구원론적 구조에서 본 세례관
웨슬레에게 있어서 세례란 사건(중생을 낳게 하는) 이요, 또는 과정(새로운 삶의 성장이 강조된 -성화)으로 이해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이같이 세례는 기독자 생활 전체, 곧 의인, 중생, 성결을 망라한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관심은 후자, 곧 세례에 있어서 의 과정의 차원에 있었다. 웨슬레에 있어서 세례는 신자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될 때에야 비로소 그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례를 이해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성결에 대한 웨슬레의 주관 관심이 세례관에는 올바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이 세례관을 “복음적 신인협동설”로 표현되는 그의 신학적 구조에 밀접하게 평형시키면서 전개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웨슬레 신학의 전체적인 체계에 가장 일관성 있는 것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몸안으로 연합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찾는 데 있다. 그의 “세례에 의한 중생”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변화”이다. 곧 유아(혹은 성인)들이 은혜의 왕국, 곧 교회 안으로 옮겨지는 관계의 변화를 말한다. 이것은 세례에 의한 거듭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세례로 말미암은 중생은, “그리스도 교회의 몸 안에 접붙여졌다. 곧 하나님의 양자 삼으심과 은혜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혜의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신자들의 몸으로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고교회적 교회관에서 볼 때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편입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례가 베풀어지는 바로 그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약속되어진 곳이요,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총)을 받으며 세례를 받은 신자가 성장하여 마침내는 영혼의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의미를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될 때, 세례란 교회가 중요하게 합동적으로 시행하는 행위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례는 교회가 어떤 사람을 구별하여 세례받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은혜의 왕국 안으로 편입시켜, 객관적으로 이미 주어진 바 된 구속의 복음(이미 주어진 선재은혜 그리고 믿는 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의인의 은혜와 성결의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거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세례는 “행위의 케리그마” 또는 “복음의 성례전”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세례에 있어서 믿음의 역할은 세례(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다. 세례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만 세례에서 선포되고 약속된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받으며, 그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웨슬레 자신이 이해했던 것처럼 만약 세례받음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의미에서 거듭나 내적 변화와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낮은 의미에서 거듭나 겨우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세례받은 사람의 믿음의 정도에 상관되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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