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김연수, 구연경, 민창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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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방 전후 김연수, 구연경, 민창주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해 이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를 보지 않았으니 이는 경성방직에 있어서 호재는 호재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 친화적, 그것도 대기업 친화적 성격을 띠었던 물산장려 운동은 그 성격을 간파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혹의 눈길 속에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924년이 되자 김연수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농장형 경영방식으로 바꾸고 이를 삼수사라고 이름 붙인다. 고부 김씨가가 가졌던 막대한 토지는 이러한 농장형 경영방식으로 변화해 가면서 더더욱 토지 지배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1-2. 청년 전기-본격적인 기업 경영
김연수의 사업적 행보가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은 1925년이었다. 김연수는 이 때 한일 은행 감사역을 맡아 조선에 있던 은행권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여 사업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를 원활히 하려했다. 김연수 주도의 경성방직이 점점 궤도에 오르려 하던 1926년, 경성방직에서는 파업이 일어난다. 경성방직 내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공장 내의 상조회에서 사회주의적 노동계급의 해방과 새 사회의 구현을 갈구했던 당시의 사회상황에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요구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었다기 보다는 생존에 관련된 사항이 더 많았다. 위험한 작업환경의 개선과 생계를 꾸리기에 부족한 임금의 인상 등이 그 주요 안건이었으나 사회주의적 단체와 연결 되어 있던 상조회의 성격과 노동자보다 기업가를 귀하게 여기는 사회 풍토, 일반 시민보다 자본가에게 가까운 경찰력의 동원 등으로 결국 경방의 첫 번째 파업은 막을 내리고 만다.
1927년, 김연수는 한일은행 뿐만 아닌 해동은행도 인수하여 전무로 취임한다. 여기서 그가 사업과 자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돈이 돈을 번다”라는 현대의 우스갯 소리처럼 사업을 크게 키우기 위해서는 대 자본이 꼭 필요했고, 이를 위해 총독부에 보조금을 요청했지만 거기에서 나온 보조금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의 은행들에서 직위를 갖거나 은행은 인수하여 그 부족분을 채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김연수의 치밀한 면모 또한 발견하게 된다. 김연수는 당시에 분명 삼수사로 재정비한 자기 소유의 토지가 있었고 그의 뒤에는 호남의 대지주인 고부 김씨가가 있었다. 그러나 김연수는 자신의 소유지를 팔거나 이를 담보로 돈을 대부한 일도 없고, 고부 김씨가도 경성방직이 주식회사가 되면서 투자를 통해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집안의 사활을 걸만큼 큰 투자는 꺼렸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마어마한 토지를 가진 부호임에도 불구하고 매관매직을 통해서라도 문관으로 입신양명하고 싶어했던 김씨가의 가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소작인들로 인해 매년 재산이 증식해 가는 김씨가로서는 상공업에 대한 천시를 갖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김연수가 확장하려하는 경방의 사업적 성공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젊고 야심에 가득찬 김연수는 집안의 돈이 아닌 외부의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토착 은행들로서는 그의 요구를 충족할 만한 현실적인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김연수는 총독부와 식산은행에서의 보조금과 대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김연수는 자연히 조선에 있는 일본의 고위층 인사들과 식산은행의 인사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몇 년 동안 거치면서 김연수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립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배워온 지식과 발전 모델을 조선에 투입해 조선인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기업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기업을 키우는 것이 자신의 목표가 되었던 것 같다. 총독부와 식산은행과의 긴밀하고 밀접한 관계가 지속 되면서 1929년 경성방직이 식산은행으로부터 받는 대부 금액은 그 최고치를 크게 갱신한다. 이렇듯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민족으로 출생했으나 조선인으로서는 누리기 힘든 후하고 풍족한 여건을 조성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1. 청년 후기 -민족기업이 아닌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본격적 친일 성향의 시작
그리고 몇 년 뒤 1931년은 경성방직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와중에 두 번째 파업이 일어났다. 주로 여직공을 이용해 생산을 했던 경방은 마치 창살 없는 감옥처럼 기숙사제도를 악용하여 여공들에게 인간적인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고 주주들에게 후하게 배당금을 나누어 주기 위해 고용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는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강제적 저금 제도를 이용해 고용의 해지에 있어서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1차의 파업보다 더 격렬하게 이루어졌던 2차 파업은 결국 회사 측에서 경찰력을 동원하게 되면서 유혈 사태로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적 상황을 거치며 노동자의 착취가 계속되었다. 부산에 있었던 일본인 회사인 조선 방직의 노동자 임금이 경방보다 높았다는 점은 경방이 민족기업으로 간주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1931년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해이기도 하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김연수와 경성방직에게 있어서 매우 큰 기회였다. 조선의 중, 남부에서 일본 기업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찍부터 조선 북부와 만주지방으로 새로운 시장을 호시탐탐 개척하려 했던 경성 방직과 김연수에게 일제의 만주 침략은 하늘이 준 기회였을 것이다. 여기서 김연수가 민족 기업가라고 보기 힘든 또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만약 그가 진실로 조선의 민족만을 위해 기업을 하고 자본을 축적하려 했다면 기업가로서 일반 대중에게 기여할 수 있는 노동자의 고용이나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조선 영토만을, 그것도 우선 자신이 이미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던 중, 남부 지방에 집중해야했던 것이 옳다. 그 땅에서 일본 기업과 맞서 조선인의 기반을 지켜내고, 닦아냈어야 함이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연수는 상대적으로 자신이 말했던 “민족기업”으로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조선 북부 지역과 만주로 눈을 돌렸다. 이는 김연수가 민족 기업으로서의 자리보다 보다 많은 이윤 추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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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3.10.01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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