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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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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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를 거둠으로써 내외몽고를 모두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8세기 중반에 들어가 건륭제는 내륙 아시아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를 붕괴시킴으로써 신장과 티벳까지 청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러시아와 청의 이러한 내륙으로의 팽창은 여태까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오아시스민들의 자율적인 공간을 빼앗아갔고 궁극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초원의 유목민들은 청러의 지방행정체제 안으로 구획편입되어 종래 유목사회의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어 라마교의 확산과 상업자본의 침투 역시 그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를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또한 정주 오아시스 사회 역시 청러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존의 사회계층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청러의 통제하에서 세속적인 지배층이 영향력을 상실하는 반면,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절대다수가 무슬림인 주민들에게 새로운 카리스마를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주도하에 여러 차례 ‘성전’이 시도되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중앙아시아사회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근대화의 물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3)중앙아시아의 과제
20세기 전반 중앙아시아사회는 모두 사회주의 혁명의 세례를 받으며 사회주의국가 중국과 소련에 편입되었다. 한인과 러시아인이 실제로 모든 정치. 문화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그 영내의 소수민족들을 중국인 혹은 소련인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 소련의 붕괴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었고,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짜로 독립을 획득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느냐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중국이 소련과 같은 길을 가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지만 소수민족, 특히 언어와 문화와 종교를 달리하는 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들(위구르티벳몽고)의 주체적인 목소리는 중국정부에게 여러 가지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4)동서문화교류와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은 각각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문화권을 형성시켜왔다. 각 문화권은 산맥, 고원, 사막, 바다 등의 자연현상을 경계로 하여 나뉘어져 있었으나 ‘초원의 길’, ‘비단길’, ‘바닷길’을 통해 점차 다른 문화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5)기마민족과 초원길
유라시아대륙의 초원건조지대의 남러시아, 키르기스초원, 알타이산맥 그리고 몽골고원을 관통하는 이 길은 옛부터 많은 유목민족의 활동무대였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이 길은 알려졌으며, 기원전 7세기 이후 스키타이인들의 특색있는 청동기 문화가 동방에 전해지면서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후 흉노선비유연이 이 길을 지배했다. 6~9세기까지는 투르크계의 돌궐이나 위구르족이, 13~14세기에는 몽골족이 이 길에서 활약했다. 또한 게르만족의 이동을 초래했다고 전해지는 훈족도 이 길을 따라 유럽에 침입했다. 그들은 기마민족으로서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이 길을 지배했는데, 무엇보다도 상업적 이익을 차지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초원의 유목민과 오아시스도시는 때로는 서로 대립, 항쟁하기도 하고 정복, 피정복 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공존, 공영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아시스주민은 유목민에게 모피와 양피를, 유목민은 곡물과 수공업품을 얻었다.
6)비단길과 동서문화의 교류
3개 교통로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지중해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고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및 중국을 잇는 길로, 중국의 비단이 이 길을 통해서 서방에 많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후에 ‘비단길’이라 불렸다. 이 길은 중앙아시아에서 북상하는 교통로와 합류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동서문화교류를 촉진시켜, 헬레니즘문화를 북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한국일본에까지 전파시켰다.
한무제 때 장건을 파견함으써 시작된 한의 서역지배는 동서교류를 자극하여, 중국의 비단이 서역으로 가고 서역의 음악공예품말포도 등이 인도의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후 위진남북조로부터 당대에 걸쳐서 서역의 종교나 사산조페르시아의 미술, 공예품, 인도의 굽타 문화등이 중국에 유입되었고 중국의 제지법이 이슬람세계에 전해졌으며, 사산조의 군주제도나 공예품, 이슬람의 다량한 문화 역시 유럽세계에 전해졌다. 당시 동서교역에 중개역할을 담당했던 민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이었다. 그들은 유목민족으로 통행세보호세 등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상업활동을 보장받았다.
7)바닷길과 세계사의 성립
이 길에서는 기원 전후부터 인도양의 계절풍을 이용한 해상무역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로마제국시대에 한층 더 번영했다. 이 길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홍해를 거쳐, 남지나해에 이르는 바닷길이다. 인도양에는 인도인과 이란인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나 이슬람제국의 발전에 따라 차츰 아라비아인의 진출이 활발해졌다. 아랍인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8세기 이후 아랍인의 중국 내왕이 한층 활발해졌으나 곧 중국인도 대형선박을 건조하여 인도항로에 참여했다. 아랍인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향료와 약을, 중국에서 도자기나 칠기 등을 구입하여 유럽에 판매하였다. 몽골제국 시대에 동서교통은 해륙 모두 번창하여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등 대여행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조공무역의 확대를 꾀하여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대선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개별적인 세계로 발전해왔던 유럽은 이슬람세계와의 교섭에 커다란 자극을 받고 11세기 이후부터 세계를 향해 팽창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지리상의 발견 혹은 대항해시대를 초래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후 내륙아시아를 통해 행해진 여러 문화권의 교류는 쇠퇴하게 되었고 바닷길을 통한 교류가 한층 확대, 강화되었다. 특히 유럽인들에 의한 비유럽 세계로의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세계의 일체화가 실현되어 갔다.
중앙아시아의 역사
오형식, 1997 <중앙아시아의 역사> 역사교육 39 (전국역사교사모임)
1. 중앙아시아의 개념과 지리적 특징
2. 초원의 사회
3.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관계
4. 투르키스탄의 성립
5. 정복왕조의 탄생
6. 몽고제국의 출현
7. 근세의 중앙아시아
천리안 '전국역사교사모임'(ht)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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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1.12
  • 저작시기201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92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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