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국어 종성 표기의 변천사 정리 (중세-근대-현대)
1. 중세국어의 종성표기
2. 근대국어의 종성표기
3. 현대국어의 종성표기
Ⅱ. 국어 표기법 역사에 나타나는 분철 확대의 양상 조사
1. 15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2. 16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3. 17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4. 18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5. 19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참고자료
1. 중세국어의 종성표기
2. 근대국어의 종성표기
3. 현대국어의 종성표기
Ⅱ. 국어 표기법 역사에 나타나는 분철 확대의 양상 조사
1. 15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2. 16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3. 17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4. 18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5. 19세기 문헌의 분철 표기
※참고자료
본문내용
국어정서법의 이해 리포트
Ⅰ. 국어 종성 표기의 변천사 정리 (중세-근대-현대)
국어 종성의 표기역사는 넓게 잡으면 한자에 의한 문자생활이 시작된 때로 보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국어 종성의 표기법 역사는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표기법은 우리 국어 전반을 기록할 만큼 확고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시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국어 표기법의 일부로 보았을 뿐, 진정한 표기법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익섭, 1992, 국어표기법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종성 표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지나간 국어의 모습을 되돌아본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국어 표기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글 종성 표기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그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세국어의 종성표기
① 『훈민정음』에서의 종성
훈민정음은 음소문자이다. 음소문자인 훈민정음이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서 표기하는 방법을 채택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에 모아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대체로 한자와 어울리기 편하도록 모아쓰기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쓰는 음절식 운영이 시각적 간편성이 있기 때문에 모아쓰기를 일부러 채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종래의 일부 논의에서는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이는 『훈민정음』에 등장하는 규정의 상이성과 문헌에 따라 표기법상으로 약간이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은 우여곡절 속에서 탄생하게 되는데,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원문 중에서 종성과 관련 되는 것을 그대로 적어 보았다.
앞의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에 관한 조항을 살펴보면, 1항과 2항은 글자 만드는 방법을, 3항에서 5항은 순수 국어인 한글의 종성표기법을, 6항과 7항은 외래어인 한자어에 대한 종성표기법을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조항을 현대 맞춤법식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논란을 겪는다. 이러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그 핵심은 ‘종성부용초성’과 ‘팔자가족용’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종성부용초성’을 원칙으로 두고, ‘팔자가족용’을 허용한 것으로 본다면,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은 ‘형태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음소주의’를 편의상 허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팔자가족용’만이 받침으로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해석한다면,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처음부터 ‘음소주의’를 원칙으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은 ‘형태 표기’와 ‘음소 표기’ 중 어느 것을 먼저 원칙으로 정하였을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명확한 해설이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원칙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 원칙이 ‘형태주의’였다 혹은 ‘음소주의’였다라는 주장으로 크게 나뉘어 논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창기 국어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예의편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예의편의 규정인 \'종성부용초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판단했지만 이는 종성표기법 상의 규정이라기보다 문자 제자상의 규정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훈민정음』의 성격상 예의편은 새 문자 즉, 훈민정음에 대한 올바른 예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종성에 대한 규정으로 가장 중시해야 할 규정은 역시 해례편 종성해의 규정이다. 다만, 종성해에서 \'ㅿ\'과 \'ㅅ\'은 발음상으로 차이가 남을 암시하고서도 8종성체계에서 \'ㅿ\'을 빼버렸음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였다.
『훈민정음』의 규정대로 15세기 종성표기법을 팔종성법으로 가정하고 이에 대한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자는 종성 표기에 있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즉, 형태소의 이형태들을 표기상에 그대로 반영하는 방법(팔종성법)과 모든 형태소들을 그 기본형에 의해 대표시키는 방법(종성부용초성법)을 인지했으며, 새로운 문자의 창제였으므로 보다 쉬운 방법인 전자를 선택하여 실용성을 도모했던 것이다.
둘째, 팔종성법의 선택은 당시의 음운 현상에 비추어 볼 때도 합리적인 음운론적 처리의 결과였다. 오늘날의 음운 현상에 비추어 볼 때, \'ㄷ·ㅅ\'의 구별 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당시의 표기사례의 검토와 다른 자료를 볼 때 팔종성법은 합당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
한편, 15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종성표기법을 \'팔종성법\'으로 가정했을 때, 어긋나는 예는 잘 알려진 바대로 두 종류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들 문헌도 표면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문헌은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첫째,『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에만 제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 예를 보면 아래의 예와 같으며, (ㄱ)은 『용비어천가』, (ㄴ)은 『월인천강지곡』의 예이다.
ㄱ. 곶(花2), 깊고, 높고(34), 좇거늘, 좇잡거늘(36), 빛나시니이다(80)
ㄴ. 곶(7,42,81), 낱(40,91,92), 붚(40), 낯(49),
Ⅰ. 국어 종성 표기의 변천사 정리 (중세-근대-현대)
국어 종성의 표기역사는 넓게 잡으면 한자에 의한 문자생활이 시작된 때로 보아야 하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국어 종성의 표기법 역사는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표기법은 우리 국어 전반을 기록할 만큼 확고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였고,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시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국어 표기법의 일부로 보았을 뿐, 진정한 표기법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익섭, 1992, 국어표기법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종성 표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지나간 국어의 모습을 되돌아본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국어 표기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글 종성 표기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그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세국어의 종성표기
① 『훈민정음』에서의 종성
훈민정음은 음소문자이다. 음소문자인 훈민정음이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서 표기하는 방법을 채택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에 모아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대체로 한자와 어울리기 편하도록 모아쓰기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쓰는 음절식 운영이 시각적 간편성이 있기 때문에 모아쓰기를 일부러 채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종래의 일부 논의에서는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복잡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이는 『훈민정음』에 등장하는 규정의 상이성과 문헌에 따라 표기법상으로 약간이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은 우여곡절 속에서 탄생하게 되는데,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원문 중에서 종성과 관련 되는 것을 그대로 적어 보았다.
앞의 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에 관한 조항을 살펴보면, 1항과 2항은 글자 만드는 방법을, 3항에서 5항은 순수 국어인 한글의 종성표기법을, 6항과 7항은 외래어인 한자어에 대한 종성표기법을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조항을 현대 맞춤법식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훈민정음』의 종성 표기법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논란을 겪는다. 이러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그 핵심은 ‘종성부용초성’과 ‘팔자가족용’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종성부용초성’을 원칙으로 두고, ‘팔자가족용’을 허용한 것으로 본다면,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은 ‘형태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음소주의’를 편의상 허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팔자가족용’만이 받침으로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해석한다면,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처음부터 ‘음소주의’를 원칙으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은 ‘형태 표기’와 ‘음소 표기’ 중 어느 것을 먼저 원칙으로 정하였을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명확한 해설이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원칙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 원칙이 ‘형태주의’였다 혹은 ‘음소주의’였다라는 주장으로 크게 나뉘어 논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창기 국어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예의편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예의편의 규정인 \'종성부용초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판단했지만 이는 종성표기법 상의 규정이라기보다 문자 제자상의 규정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훈민정음』의 성격상 예의편은 새 문자 즉, 훈민정음에 대한 올바른 예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종성에 대한 규정으로 가장 중시해야 할 규정은 역시 해례편 종성해의 규정이다. 다만, 종성해에서 \'ㅿ\'과 \'ㅅ\'은 발음상으로 차이가 남을 암시하고서도 8종성체계에서 \'ㅿ\'을 빼버렸음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였다.
『훈민정음』의 규정대로 15세기 종성표기법을 팔종성법으로 가정하고 이에 대한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자는 종성 표기에 있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즉, 형태소의 이형태들을 표기상에 그대로 반영하는 방법(팔종성법)과 모든 형태소들을 그 기본형에 의해 대표시키는 방법(종성부용초성법)을 인지했으며, 새로운 문자의 창제였으므로 보다 쉬운 방법인 전자를 선택하여 실용성을 도모했던 것이다.
둘째, 팔종성법의 선택은 당시의 음운 현상에 비추어 볼 때도 합리적인 음운론적 처리의 결과였다. 오늘날의 음운 현상에 비추어 볼 때, \'ㄷ·ㅅ\'의 구별 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당시의 표기사례의 검토와 다른 자료를 볼 때 팔종성법은 합당한 조치였다고 판단된다.
한편, 15세기 국어의 일반적인 종성표기법을 \'팔종성법\'으로 가정했을 때, 어긋나는 예는 잘 알려진 바대로 두 종류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들 문헌도 표면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문헌은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첫째,『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에만 제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 예를 보면 아래의 예와 같으며, (ㄱ)은 『용비어천가』, (ㄴ)은 『월인천강지곡』의 예이다.
ㄱ. 곶(花2), 깊고, 높고(34), 좇거늘, 좇잡거늘(36), 빛나시니이다(80)
ㄴ. 곶(7,42,81), 낱(40,91,92), 붚(40), 낯(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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