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황진이’ 그녀는 누구?
2. 기존 연구
3. 주제
Ⅲ. 결론
Ⅱ. 본론
1. ‘황진이’ 그녀는 누구?
2. 기존 연구
3. 주제
Ⅲ. 결론
본문내용
용)
고 한 지적은 기녀시조에 눈물과 한숨이 자주 등장하고 한과 그리움, 외로움의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황진이 시조에서도 일반적인 기녀 시조의 모습이 발견되지만, 그보다는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더욱 강하게 부각됨으로써, 황진이의 시조에 대해 최동호는 \'황진이 시의 양면성과 현대적 변용\'(『어문논집』18집, 안암어문학회, 1977, p. 186.) 황진이의 시조 또한 여성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는 \'눈물어린 연약한 감상적인 여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보았다. 또한 김상진의 \'기녀시조의 맥락과 황진이시조의 팜므파탈\'(『고전시가 엮어읽기』하, 태학사, 2003, pp. 102-108.)에서도 황진이 시조가 한 편으로는 기녀시조의 정서를 수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거리 두기\', \'우월적으로 인식하기\',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일반적인 기녀시조의 맥락과 거리가 있음을 설명하였다.(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p.192. 재인용)
기녀시조의 일반에서 일탈된 모습을 보인다. 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한국언어문화』제 27집. 한국어문화학회, 2005. pp. 190-192.
말하자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 화자의 태도에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 몇 편을 통해 그러한 차별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1)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이시라 더면 가랴마 제 구여
보고 그리 情(정)은 나도 몰라 노라.
『청구영언』(진본)6 『해동가요』(일석본)
초장에서 화자는 그리워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임을 떠나보냈다. 임의 부재란 상황만으로도 괴로운 현실인데, 화자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런 임을 스스로 떠나보낸 중장의 상황이다. 가지 말라고 했다면 굳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이 떠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화자의 탓이다. 요컨대 떠난 임을 두고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원망한 그 누구도 없이 모든 일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쓸쓸하기만 하다. 비록 ‘눈물’이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노래의 정서로 봤을 때,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홀로 앉아 눈물짓고 있을 화자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상진, ‘기녀시조의 맥락과 황진이 시조의 팜므파탈’, 박노준,『고전시가 엮어읽기』, 태학사, 2003. p. 94.
‘어져’와 ‘이시라’는 감탄사와 명령어가 대립 관계에 놓인다. ‘어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적 외침이고 ‘이시라’는 내가 임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말과 행동의 불균형을 포면 구조로 하고 있다. ‘내 일이야’와 ‘하더면’은 후회의 대립성이 된다. ‘내일’은 확정적 나의 행동이고 ‘더면’은 만약(if)의 가설형이 된다. ‘그릴줄’은 그렇게 될 줄, 혹은 그리워 할 줄의 두 가지 의미 개념이다. ‘가랴마’은 ‘갈리 있을까마는’으로 ‘가지 않는다’의 뜻이다. 전자는 그리움이고 빈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가지 않는다’ 뜻과 반대가 된다. ‘갔다’와 ‘가지 않을 것’이라는 대립 관계가 된다. ‘모르가’는 몰랐다이고 ‘제 구여’는 억지로 행동한 의지적 표출로 상대방을 밀어서 보냈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이와 같이 마음과 행동의 대립적 결과는 종장에서와 같이 ‘보내고’ ‘그리는 정’이 된다. 그러나 ‘그리 정’은 보낸 만큼의 큰 비중으로 정이 살아나고 있음을 재강조하는 구조가 되어 감탄의 극치가 된다. 이영지, 『한국시조문학론』, 양문각, 1994. pp, 110-111
이처럼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함에 있어서 기녀 시조의 맥락을 수용하는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의 근거에 대해서는 인간이 지니는 본연의 성향과 함께, 시대적 한계 및 신분적 한계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슬픈 현실일 것이다. 요즘 세상이라면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별을 막아 볼 수도 있고, 떠난 임을 찾아 볼 수도 있겠으나, 조선조 여인에게 사랑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그 신분은 기녀에 불과하다.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릴 만큼 당시의 관념은 그녀들을 인격적인 주체로 생각하기보다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이별을 해도 아픔은 늘 그녀들의 몫으로 남아야만 했고, 황진이의 시조에서도 이러한 아픔을 노래했다 하겠다. 김상진, 위의 글, p. 94.
하지만 김상진은 그의 다른 논문에서 이 시조가 갖는 차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떠나간 임을 그리워 한다는 점에서는 기녀시조의 일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의 화자는 슬픔을 타자화 시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변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움은 그리움에 그칠 뿐 슬픔이나 한으로까지 확대되지 않는다. 「어져 내일이야」에서 보이는 화자의 태도는 얼핏 이중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보낸 것도 화자이고, 그리워하는 것도 화자이다. 하지만, 무책임하게도 보일 수 있는 종장의 이러한 진술은 초ㆍ중장의 상황과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초장의 진술로 떠난 후의 상황을 예견하는 가하면 중장에서는 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주도적 위치에 올려놓는다. 있으라고 했으면 임은 굳이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화자의 뜻으로 임을 보냈다는 것인데, 이는 임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주체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다. 더욱이 임이 떠난 후의 그리움을 화자는 처음부터 예견했던 일이기에 그것으로부터 담담해 질 수 있다. 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한국언어문화』제 27집. 한국어문화학 회, 2005. pp. 192-193.
따라서 이 시조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일반의 기녀 시조와 그 맥이 닿아있으면서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당면한 이별이므로, 즉 임이 떠난 후의 그리움을 화자는 처음부터 예견했던 일으므로 다른 기녀시조에서처럼 그 그리움이 슬픔이나 한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나타나있다는 데서 차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산은
고 한 지적은 기녀시조에 눈물과 한숨이 자주 등장하고 한과 그리움, 외로움의 정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황진이 시조에서도 일반적인 기녀 시조의 모습이 발견되지만, 그보다는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더욱 강하게 부각됨으로써, 황진이의 시조에 대해 최동호는 \'황진이 시의 양면성과 현대적 변용\'(『어문논집』18집, 안암어문학회, 1977, p. 186.) 황진이의 시조 또한 여성의 사랑을 말하지만 이는 \'눈물어린 연약한 감상적인 여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보았다. 또한 김상진의 \'기녀시조의 맥락과 황진이시조의 팜므파탈\'(『고전시가 엮어읽기』하, 태학사, 2003, pp. 102-108.)에서도 황진이 시조가 한 편으로는 기녀시조의 정서를 수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거리 두기\', \'우월적으로 인식하기\',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일반적인 기녀시조의 맥락과 거리가 있음을 설명하였다.(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p.192. 재인용)
기녀시조의 일반에서 일탈된 모습을 보인다. 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한국언어문화』제 27집. 한국어문화학회, 2005. pp. 190-192.
말하자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 화자의 태도에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품 몇 편을 통해 그러한 차별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1)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이시라 더면 가랴마 제 구여
보고 그리 情(정)은 나도 몰라 노라.
『청구영언』(진본)6 『해동가요』(일석본)
초장에서 화자는 그리워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임을 떠나보냈다. 임의 부재란 상황만으로도 괴로운 현실인데, 화자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런 임을 스스로 떠나보낸 중장의 상황이다. 가지 말라고 했다면 굳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이 떠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화자의 탓이다. 요컨대 떠난 임을 두고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원망한 그 누구도 없이 모든 일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마음은 더욱 쓸쓸하기만 하다. 비록 ‘눈물’이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노래의 정서로 봤을 때,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홀로 앉아 눈물짓고 있을 화자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상진, ‘기녀시조의 맥락과 황진이 시조의 팜므파탈’, 박노준,『고전시가 엮어읽기』, 태학사, 2003. p. 94.
‘어져’와 ‘이시라’는 감탄사와 명령어가 대립 관계에 놓인다. ‘어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적 외침이고 ‘이시라’는 내가 임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말과 행동의 불균형을 포면 구조로 하고 있다. ‘내 일이야’와 ‘하더면’은 후회의 대립성이 된다. ‘내일’은 확정적 나의 행동이고 ‘더면’은 만약(if)의 가설형이 된다. ‘그릴줄’은 그렇게 될 줄, 혹은 그리워 할 줄의 두 가지 의미 개념이다. ‘가랴마’은 ‘갈리 있을까마는’으로 ‘가지 않는다’의 뜻이다. 전자는 그리움이고 빈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가지 않는다’ 뜻과 반대가 된다. ‘갔다’와 ‘가지 않을 것’이라는 대립 관계가 된다. ‘모르가’는 몰랐다이고 ‘제 구여’는 억지로 행동한 의지적 표출로 상대방을 밀어서 보냈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이와 같이 마음과 행동의 대립적 결과는 종장에서와 같이 ‘보내고’ ‘그리는 정’이 된다. 그러나 ‘그리 정’은 보낸 만큼의 큰 비중으로 정이 살아나고 있음을 재강조하는 구조가 되어 감탄의 극치가 된다. 이영지, 『한국시조문학론』, 양문각, 1994. pp, 110-111
이처럼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함에 있어서 기녀 시조의 맥락을 수용하는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의 근거에 대해서는 인간이 지니는 본연의 성향과 함께, 시대적 한계 및 신분적 한계를 생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슬픈 현실일 것이다. 요즘 세상이라면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별을 막아 볼 수도 있고, 떠난 임을 찾아 볼 수도 있겠으나, 조선조 여인에게 사랑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그 신분은 기녀에 불과하다. 해어화(解語花)라고 불릴 만큼 당시의 관념은 그녀들을 인격적인 주체로 생각하기보다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꽃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이별을 해도 아픔은 늘 그녀들의 몫으로 남아야만 했고, 황진이의 시조에서도 이러한 아픔을 노래했다 하겠다. 김상진, 위의 글, p. 94.
하지만 김상진은 그의 다른 논문에서 이 시조가 갖는 차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떠나간 임을 그리워 한다는 점에서는 기녀시조의 일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의 화자는 슬픔을 타자화 시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변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움은 그리움에 그칠 뿐 슬픔이나 한으로까지 확대되지 않는다. 「어져 내일이야」에서 보이는 화자의 태도는 얼핏 이중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보낸 것도 화자이고, 그리워하는 것도 화자이다. 하지만, 무책임하게도 보일 수 있는 종장의 이러한 진술은 초ㆍ중장의 상황과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초장의 진술로 떠난 후의 상황을 예견하는 가하면 중장에서는 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주도적 위치에 올려놓는다. 있으라고 했으면 임은 굳이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화자의 뜻으로 임을 보냈다는 것인데, 이는 임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주체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다. 더욱이 임이 떠난 후의 그리움을 화자는 처음부터 예견했던 일이기에 그것으로부터 담담해 질 수 있다. 김상진, \'「청산리 벽계수」와 「텐미니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한국언어문화』제 27집. 한국어문화학 회, 2005. pp. 192-193.
따라서 이 시조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일반의 기녀 시조와 그 맥이 닿아있으면서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당면한 이별이므로, 즉 임이 떠난 후의 그리움을 화자는 처음부터 예견했던 일으므로 다른 기녀시조에서처럼 그 그리움이 슬픔이나 한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나타나있다는 데서 차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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