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歌辭의 개념
2. 歌辭의 분류
Ⅱ. 본론
1. 松江 鄭澈의 삶
2. 思美人曲
3. 續美人曲
4. 關東別曲
5. 思美人曲과 續美人曲의 비교 연구
Ⅲ. 결론
참고문헌
1. 歌辭의 개념
2. 歌辭의 분류
Ⅱ. 본론
1. 松江 鄭澈의 삶
2. 思美人曲
3. 續美人曲
4. 關東別曲
5. 思美人曲과 續美人曲의 비교 연구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는 6음보의 형태가 자주 나타나게 된다. 이는 가사의 내용적 측면에 관심이 더 높아지면서 형식의 측면에 비중을 덜 두게 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네 번째로, ‘제 4기’는 숙종 때 부터 동학 창도 이전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가사의 향유계층이 크게 확대됨에 따라 가사의 성격도 많이 변모되는 시기이다. 규방가사가 창작되기도 하고, 서민층에서의 가사창작 활동이 늘어나면서 토속적이거나 통속적인 느낌을 지닌 가사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한다. 또한 ‘유교 전통’이 많이 흔들리면서, 작가가 훈계를 하는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가사도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다섯 번째로, ‘제 5기’는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개화기를 거쳐 1920년대까지를 일컬으며, 격동하는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평등사상과 왜구에 대한 저항의식 등이 그것이다. 또한 규방가사가 활발해지고 개화가사, 의병가사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제 5기’는 가사문학의 ‘쇠퇴기’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개화기에 진행된 근대교육과 신문학의 창작, 그리고 일본의 표현 억압과 작품의 약탈 등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가사문학의 발전을 급속하게 위축시켰으며, 가사문학은 결국 쇠퇴 하게 되고 말았다. 위의 가사문학 분류는 다수의 국문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체계이며, 모든 국문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Ⅱ. 본론
1) 松江 鄭澈의 삶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1536년(조선 중종 31년) 12월 6일 서울 장의동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왕조 때부터 현감 벼슬을 한 ‘정극유鄭克儒’의 12대 손이다. 송강의 가문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제학提學 벼슬을 한 이래로, 다음 대에서는 정철의 고조인 정연鄭淵이 병조판서를 지냈고, 그 다음으로는 증조인 정자숙鄭自淑은 김제군수를, 그리고 조부 정위鄭는 건원릉참봉을 지냈다. 정철의 아버지는 윗대와 달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철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아가게 되고, 정철 그도 입신양명하게 되면서, 아버지도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정철은 대단한 신분이나 세력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분위기는 온화하고 화목하며 안정된 생활을 갖추고 있었고, 정철의 누이들과 왕실과의 혼약이 계속 성사되면서 가문이 새로운 시작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철은 10살 무렵까지는 매우 다복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에 자주 입궐하게 되는데, 누이의 영향으로도 그렇지만, 인척 사이에 있는 왕자들과도 어울려 놀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정철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배 다른 동생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정철은 왕자들과의 친교를 맺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철이 10살이 되던 해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게 된다. 정철의 집안이 윤씨 계열의 왕실과 인척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집안이 화를 입게 되면서 정철의 인생은 전환점에 맞게 된다. 정철의 집안에서도 아버지와 맏형이 경회루慶會樓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 1547년(명종 2년)에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을사사화’때의 처벌이 미약함을 근거로 관련 세력들을 더 궁지에 몰아놓게 되었다. 이 때 정철의 아버지도 다시 붙들려가 경상도 영일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철 역시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유배를 따라다니며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551년(명종 6년)에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은사恩赦로 7년 만에 유배에서 풀어나게 된다. 그 후로 정철의 가족은 전라남도 담양에 내려가서 거처를 정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그 후에 정철의 학문적 스승이 된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문학적 스승 ‘면앙정 송순仰亭 宋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등 에게 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정철의 유년시절은 10세 이전의 유복했던 시기와 을사사화를 기점으로 하여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 모습, 후에 다시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박영주, 『고집불통 송강평전』, 고요아침, 2003, pp.32-73.
정철은 27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1566년(명종 21년)에는 이이와 두터운 정을 쌓으며 함께 유학을 연구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사가독서란, 나라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식 기간을 주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사가독서’에 대한 정의 ( http://terms.naver.com/entry.nhn )
정철이 44세가 되던 해인 1580년(선조 13년)에는 강원도로 가서 관찰사를 지냈다. 이 때 정철의 대표적인 가사작품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시조 <훈민가訓民歌> 가 쓰였다. 정철은 1585년(선조 19년)부터 한동안 벼슬에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작품에 지었는데, 그 때 나온 작품에는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이 있다.
정철은 1589년(선조 22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의정을 역임했다. 하지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귀양을 떠나게 된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돌아와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다. 그 뒤에 정철은 반대세력에 의해 모함을 받고 스스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시골에 묻혀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정철’에 대한 정의 ( http://terms.naver.com/entry.nhn )
2) 사미인곡 思美人曲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緣연分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平평生생애 願원하요데 한데 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삼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엇그제 님을 뫼셔 廣광寒한殿뎐의 올낫더니 그 더대 엇디하야 下하界계예 나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
네 번째로, ‘제 4기’는 숙종 때 부터 동학 창도 이전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가사의 향유계층이 크게 확대됨에 따라 가사의 성격도 많이 변모되는 시기이다. 규방가사가 창작되기도 하고, 서민층에서의 가사창작 활동이 늘어나면서 토속적이거나 통속적인 느낌을 지닌 가사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한다. 또한 ‘유교 전통’이 많이 흔들리면서, 작가가 훈계를 하는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가사도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다섯 번째로, ‘제 5기’는 동학의 창도에서부터 개화기를 거쳐 1920년대까지를 일컬으며, 격동하는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평등사상과 왜구에 대한 저항의식 등이 그것이다. 또한 규방가사가 활발해지고 개화가사, 의병가사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제 5기’는 가사문학의 ‘쇠퇴기’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개화기에 진행된 근대교육과 신문학의 창작, 그리고 일본의 표현 억압과 작품의 약탈 등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가사문학의 발전을 급속하게 위축시켰으며, 가사문학은 결국 쇠퇴 하게 되고 말았다. 위의 가사문학 분류는 다수의 국문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체계이며, 모든 국문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Ⅱ. 본론
1) 松江 鄭澈의 삶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1536년(조선 중종 31년) 12월 6일 서울 장의동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왕조 때부터 현감 벼슬을 한 ‘정극유鄭克儒’의 12대 손이다. 송강의 가문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제학提學 벼슬을 한 이래로, 다음 대에서는 정철의 고조인 정연鄭淵이 병조판서를 지냈고, 그 다음으로는 증조인 정자숙鄭自淑은 김제군수를, 그리고 조부 정위鄭는 건원릉참봉을 지냈다. 정철의 아버지는 윗대와 달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철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아가게 되고, 정철 그도 입신양명하게 되면서, 아버지도 영의정에 오르게 된다. 정철은 대단한 신분이나 세력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분위기는 온화하고 화목하며 안정된 생활을 갖추고 있었고, 정철의 누이들과 왕실과의 혼약이 계속 성사되면서 가문이 새로운 시작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철은 10살 무렵까지는 매우 다복했던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에 자주 입궐하게 되는데, 누이의 영향으로도 그렇지만, 인척 사이에 있는 왕자들과도 어울려 놀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정철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배 다른 동생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정철은 왕자들과의 친교를 맺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철이 10살이 되던 해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게 된다. 정철의 집안이 윤씨 계열의 왕실과 인척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집안이 화를 입게 되면서 정철의 인생은 전환점에 맞게 된다. 정철의 집안에서도 아버지와 맏형이 경회루慶會樓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 1547년(명종 2년)에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을사사화’때의 처벌이 미약함을 근거로 관련 세력들을 더 궁지에 몰아놓게 되었다. 이 때 정철의 아버지도 다시 붙들려가 경상도 영일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철 역시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유배를 따라다니며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551년(명종 6년)에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은사恩赦로 7년 만에 유배에서 풀어나게 된다. 그 후로 정철의 가족은 전라남도 담양에 내려가서 거처를 정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그 후에 정철의 학문적 스승이 된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문학적 스승 ‘면앙정 송순仰亭 宋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등 에게 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정철의 유년시절은 10세 이전의 유복했던 시기와 을사사화를 기점으로 하여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 모습, 후에 다시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박영주, 『고집불통 송강평전』, 고요아침, 2003, pp.32-73.
정철은 27세가 되던 해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1566년(명종 21년)에는 이이와 두터운 정을 쌓으며 함께 유학을 연구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사가독서란, 나라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식 기간을 주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사가독서’에 대한 정의 ( http://terms.naver.com/entry.nhn )
정철이 44세가 되던 해인 1580년(선조 13년)에는 강원도로 가서 관찰사를 지냈다. 이 때 정철의 대표적인 가사작품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시조 <훈민가訓民歌> 가 쓰였다. 정철은 1585년(선조 19년)부터 한동안 벼슬에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작품에 지었는데, 그 때 나온 작품에는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이 있다.
정철은 1589년(선조 22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의정을 역임했다. 하지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귀양을 떠나게 된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돌아와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다. 그 뒤에 정철은 반대세력에 의해 모함을 받고 스스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시골에 묻혀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NAVER 지식백과, 두산백과, ‘정철’에 대한 정의 ( http://terms.naver.com/entry.nhn )
2) 사미인곡 思美人曲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緣연分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平평生생애 願원하요데 한데 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삼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엇그제 님을 뫼셔 廣광寒한殿뎐의 올낫더니 그 더대 엇디하야 下하界계예 나려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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