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송강 정철
2. 정철의 문학작품 분석
2-1. 『송강가사』
2-2. 가사 <성산별곡>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Ⅱ. 본론
1. 송강 정철
2. 정철의 문학작품 분석
2-1. 『송강가사』
2-2. 가사 <성산별곡>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 시가집인 진본 『청구영언』의 편찬시기보다 30여년 이상 이른 시기이다. 최규수,『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월인, 2002, 19쪽.
② 송강가사의 간행 과정
송강가사의 간행 과정을 검토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송강가사를 간행하게 된 목적이 정철의 후손들이 작품의 유실을 막고자 보존하려는 욕구에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세상에 알려진 후에 여러 차례 병란을 겪으면서 진본이 사라지기에까지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작품이 유실되고, 와전될 것을 우려하여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 위해 작품으로 묶어 보존하게 된 것이다.
둘째, 간행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살펴보면 무조건적인 간행만 추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인께서 살아계실 때에 두 본의 진위가 서로 섞이어 취사함에 미혹함이 있을까 걱정하셔서 새로 고쳐 쓴 것 한통을 장차 판을 새기는 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뜻만 갖고 이루지 못하신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긴 지 몇 년이 되었다. 지난 여름 성주에 있다가 판을 엮어 열흘만에 일이 끝났으니 이 또한 기다린 끝에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이에 널리 퍼뜨려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셋째, 후손들은 송강 작품의 대외적 확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한역작업의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한역 작업에서 <관동별곡>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사 작품을 한역하면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선조께서 지은 장, 단, 가곡이 인구에 회자된 지 거의 백여 년이 지났다. <관동별곡>은 청음, 서포, 이진사 양렬이 각각 문자로 번역했고, <장진주사>는 북헌 김공이 또한 번역했으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은 다만 속언으로 세상에 전해져 왔다. 내가 감히 선배들이 이미 한 행동을 본떠 번역해내어 보관하였으니 그 참람되고 망령됨이 크다 할 것이다. 『별집유사』, 권2.
송강의 후손인 송달수가 이러한 한역 작업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는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다른 가사와 달리 속언으로만 유전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특히 <성산별곡>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성산별곡>이 다른 작품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가사 작품이 모두 한역되었음에도 <성산별곡>이 한역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성산별곡>이 지닌 의의를 ‘성산星山’ 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산은 실제 정철의 삶에 있어서 굉장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후손들은 <성산별곡>을 더욱 가치있게 여겨 한역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본다.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월인, 2002, 75~84쪽.
2-2. 가사 <성산별곡>의 특징
<성산별곡>
① 창작 동기
먼저 성산별곡의 창작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식영정 20영>을 드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만큼 두 작품 사이에 긴밀성과 관련성이 많다는 것이다. 정철의 <식영정 20영>은 성산의 자연을 노래한 한시 작품이다. <성산별곡>의 서사 부분에서 첫 번째 부분을 보면 식영정에 대한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 (성산별곡 부분 발췌)
<성산별곡>이 지어진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이는 선행 연구들의 성과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36세 때 식영정 서하당을 지어 석천에게 시를 배우며 고봉 제봉 제현과 도의의 교를 맺어 왕래가 잦았고 이후 거업을 일삼지 않고서 임천에 우유하여 서적에 침잠하였다. 송강의 성산별곡도 이해에 김성원을 위해 작사하였다.
특히 김성원을 위해서 지은 것이며, 동시에 송강 25세 때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朴晟義, 『松江 · 盧溪 · 孤山의 詩歌文學』, 현암사, 1966, 184쪽.
성산별곡은 송강이 김성원의 생활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서 아름다운 사계 승경의 변화와 그 주인공의 유유자적하는 생활, 곧 독서, 취홍, 탄현의 풍류를 노래한 서경적인 가사이다. 崔台鎬, 「星山別曲 硏究」, 『松江文學硏究』, 국학자료원, 1993, 247쪽
이러한 언급을 통해 <성산별곡>이 김성원에 대한 흠모나, 칭송 나아가 그 생활에 대한 동경이나 선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작품 구조
<성산별곡>의 작품 구조를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본사·결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사는 성산에 깃들어 살고 있는 김성원의 삶에 대한 흠모와 그렇지 못한 자신의 삶과의 비교,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본사에서는 자연에 묻혀 사는 처사적 삶의 아름다움을 사시 경관의 흐름에 대비하여 노래하고 있으며, 결사에서는 이상적 삶과 현실적 삶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자위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성산별곡>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본사인데, 실제로는 예시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중요성에 있어서는 서사와 결사에 비해 떨어진다. 이러한 <성산별곡>의 서경적인 측면은 전체구조에서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일탈미이며, 서정적 측면이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성산별곡>은 작품 내적 흐름이 我에서 彼我로 나아가 我를 잊어버리다가, 다시 我로 돌아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진욱, 『松江 鄭澈 文學의 再認識』, 역락, 2004, 273~283쪽.
③ 작품 속 이상세계
이 작품에서 이상세계의 지향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서두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다.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人生(인생) 世間(세간)의 됴흔 일 하건마 엇디 江山(강산)을 가디록 나이 너겨
寂寞(적막) 山中(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고
松根(송근)을 다시 쓸고 竹上(죽상)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 山中(산중)의
冊曆(책력) 업서 四時(사시) 모더니 눈 아래 헤틴 景(경)이
② 송강가사의 간행 과정
송강가사의 간행 과정을 검토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송강가사를 간행하게 된 목적이 정철의 후손들이 작품의 유실을 막고자 보존하려는 욕구에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세상에 알려진 후에 여러 차례 병란을 겪으면서 진본이 사라지기에까지 이르는데, 이 과정에서 작품이 유실되고, 와전될 것을 우려하여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 위해 작품으로 묶어 보존하게 된 것이다.
둘째, 간행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살펴보면 무조건적인 간행만 추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인께서 살아계실 때에 두 본의 진위가 서로 섞이어 취사함에 미혹함이 있을까 걱정하셔서 새로 고쳐 쓴 것 한통을 장차 판을 새기는 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뜻만 갖고 이루지 못하신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긴 지 몇 년이 되었다. 지난 여름 성주에 있다가 판을 엮어 열흘만에 일이 끝났으니 이 또한 기다린 끝에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이에 널리 퍼뜨려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셋째, 후손들은 송강 작품의 대외적 확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한역작업의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한역 작업에서 <관동별곡>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사 작품을 한역하면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선조께서 지은 장, 단, 가곡이 인구에 회자된 지 거의 백여 년이 지났다. <관동별곡>은 청음, 서포, 이진사 양렬이 각각 문자로 번역했고, <장진주사>는 북헌 김공이 또한 번역했으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은 다만 속언으로 세상에 전해져 왔다. 내가 감히 선배들이 이미 한 행동을 본떠 번역해내어 보관하였으니 그 참람되고 망령됨이 크다 할 것이다. 『별집유사』, 권2.
송강의 후손인 송달수가 이러한 한역 작업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는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다른 가사와 달리 속언으로만 유전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특히 <성산별곡>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성산별곡>이 다른 작품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가사 작품이 모두 한역되었음에도 <성산별곡>이 한역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성산별곡>이 지닌 의의를 ‘성산星山’ 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산은 실제 정철의 삶에 있어서 굉장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후손들은 <성산별곡>을 더욱 가치있게 여겨 한역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본다. 최규수, 『송강 정철 시가의 수용사적 탐색』, 월인, 2002, 75~84쪽.
2-2. 가사 <성산별곡>의 특징
<성산별곡>
① 창작 동기
먼저 성산별곡의 창작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식영정 20영>을 드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만큼 두 작품 사이에 긴밀성과 관련성이 많다는 것이다. 정철의 <식영정 20영>은 성산의 자연을 노래한 한시 작품이다. <성산별곡>의 서사 부분에서 첫 번째 부분을 보면 식영정에 대한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 (성산별곡 부분 발췌)
<성산별곡>이 지어진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이는 선행 연구들의 성과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36세 때 식영정 서하당을 지어 석천에게 시를 배우며 고봉 제봉 제현과 도의의 교를 맺어 왕래가 잦았고 이후 거업을 일삼지 않고서 임천에 우유하여 서적에 침잠하였다. 송강의 성산별곡도 이해에 김성원을 위해 작사하였다.
특히 김성원을 위해서 지은 것이며, 동시에 송강 25세 때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朴晟義, 『松江 · 盧溪 · 孤山의 詩歌文學』, 현암사, 1966, 184쪽.
성산별곡은 송강이 김성원의 생활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서 아름다운 사계 승경의 변화와 그 주인공의 유유자적하는 생활, 곧 독서, 취홍, 탄현의 풍류를 노래한 서경적인 가사이다. 崔台鎬, 「星山別曲 硏究」, 『松江文學硏究』, 국학자료원, 1993, 247쪽
이러한 언급을 통해 <성산별곡>이 김성원에 대한 흠모나, 칭송 나아가 그 생활에 대한 동경이나 선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작품 구조
<성산별곡>의 작품 구조를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본사·결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사는 성산에 깃들어 살고 있는 김성원의 삶에 대한 흠모와 그렇지 못한 자신의 삶과의 비교, 나아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본사에서는 자연에 묻혀 사는 처사적 삶의 아름다움을 사시 경관의 흐름에 대비하여 노래하고 있으며, 결사에서는 이상적 삶과 현실적 삶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자위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성산별곡>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본사인데, 실제로는 예시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중요성에 있어서는 서사와 결사에 비해 떨어진다. 이러한 <성산별곡>의 서경적인 측면은 전체구조에서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일탈미이며, 서정적 측면이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성산별곡>은 작품 내적 흐름이 我에서 彼我로 나아가 我를 잊어버리다가, 다시 我로 돌아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진욱, 『松江 鄭澈 文學의 再認識』, 역락, 2004, 273~283쪽.
③ 작품 속 이상세계
이 작품에서 이상세계의 지향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서두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다.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人生(인생) 世間(세간)의 됴흔 일 하건마 엇디 江山(강산)을 가디록 나이 너겨
寂寞(적막) 山中(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고
松根(송근)을 다시 쓸고 竹上(죽상)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 안자 엇던고 다시 보니 ··· 山中(산중)의
冊曆(책력) 업서 四時(사시) 모더니 눈 아래 헤틴 景(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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