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 시가 - 처용가와 가사부전 향가 - 고전시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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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고전 시가 - 처용가와 가사부전 향가 - 고전시가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론
< 처용가> 1. 핵심정리
2. 노랫말의 어석연구
3. 노랫말의 성격과 의미 검토
4. 처용가의 배경설화
5. 설화 분석의 방법적 반성
6. 「처용랑 망해사」의 검토
7. 설화의 전체적 구조
8. 처용가의 연구서
<가사부전향가>
Ⅲ. 맺음말
*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것이다. 아내의 병을 치료하는 직능을 수행하는 처용은 의술사로서의 무당인 것이다. 결국 그의 역할로 역신이 물러났다.
삼국 통일을 통하여 영토가 확대되자 이를 체계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지방 행정 조직의 재편도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신문왕 5년에 9주 5소경, 그 아래에 군현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행정촌이 있고 다시 그 아래에 자연촌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그 지방 토착 세력인 촌주가 있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 아래 그 지역의 자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촌주들의 자제 하나를 서울에와 살게 하는 상수리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이르러 기인 제도로 발전했다.
<감상>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 및 벽사진경(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임)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노래는 \'본디 내해다마는 아자날 엇디하릿고\'라는 구절에서 그 절정을 느끼게 하는데, 이것은 체념적인 농사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초극적 이미지를 부각시킨다고 볼 수 있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물소개 : 헌강왕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朝鮮金石總覽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886, 신라 제49대왕, 재위 875∼88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며,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정강왕), 만(曼:뒤의 진성여왕), 윤(胤)이 있었다. 서자로 요(嶢)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즉위한 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望海寺)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詩)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879년에 신홍(信弘)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 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處容)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 處容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용을 지방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其人制度)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狄國)인 보로국(寶露國:지금의 안변군 서곡면 ?)과 흑수국(黑水國)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2. 노래말의 어석연구 박병채, 고려가요의 어석연구, 국학자료원
1) 이시인생애 상불어 시란 : 이로써 인생에
- ‘이시인생’에 처격접미사 ‘애’가 연결된 형
2) 만두삽화 계오샤 기울어신 머리예 : 머리에 가득 꽂은 꽃이 겨우시어 기울어지신
- ‘계오샤’는 동사어간 ‘계오’에 존칭선행어미 ‘시’와 부사형어미 ‘아’가 연결된 형으 로 ‘계오’는 ‘계우’의 혼란된 표기로, 「악장가사」에는 ‘계우’로 바로 쓰였다. 「악 학궤범」소재 <처용가>의 다른 곳에도 ‘계우’로 표기되었다. (예:우리옷 계우면 큰 죄 닙고 <월석 2:72>)
- 동사어간 ‘기울’에 선행어미 ‘거’의 ‘ㄱ’탈락형 ‘어’와 존칭선행어미 ‘시’, 관형사형 ‘ㄴ’이 연결된 형이다. ‘어신’은 ‘거신’의 ‘거>어’로 ‘ㄱ’이 탈락된 형으로 ‘거’는 행동, 사실의 지속이나 미래의 전망 등의 의미를 가진 선행어미로, 과거회상을 나 타내는 선행어미 ‘더’와 마찬가지로 존칭의 선행어미 ‘시’와 연결되어 사용될 때는 ‘거시, 더시’형으로 존칭의 선행어미에 선행하였다. 처용가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거신>어신’형은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처용의 모습을 수식한 본 연에서 빈번히 사용된 다음과 같은 형을 볼 때 ‘거신>어신’이 ‘ㄱ’탈락임을 보여 준다.
‘거신’형 : 넙거신 니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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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20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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