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발생론 - 형식적연원, 형성의 계층과 시기, 장형시조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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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조 발생론 - 형식적연원, 형성의 계층과 시기, 장형시조의 발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시조 발생론
1.형식적연원
- 문학적연원론, 음악적연원론

2.형성의 계층과 시기
- 형성시기, 형성계층, 연행관습

3.장형시조의 발생

본문내용


(附葉) 니미 나肩悧마 니瑯시니잇가
(五葉)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정과정의 경우, 전ㆍ중ㆍ후강의 세 분절과 부엽의 두 분절, 즉 다섯 개의 분절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엽은 노랫말이 있는 부분과 여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진작 형식의 기본형은 네 분절의 실사와 하나의 여음 분절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림별곡의 음악적 구성 역시 다르긴 하지만, 세 개의 의미 있는 노랫말 분절과 하나의 후렴구, 그리고 엽으로 첨가된 것을 볼 수 있다.
3) 3분절, 5분절 양식의 공존
위에서 본 분절 형식과 관련하여, 북전은 <금합자보>와 <대악후보>에 실려 있다. <금합자보>의 북전은 6행으로 되어 있으며 세 개의 분절로 나뉘고 있다. 이는 음악의 편성이 시조창의 3장 형식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반면, <대악후보>의 북전은 다섯 개의 분절로 만대엽의 악곡 형식과 관계가 있다.
북전의 양식이 두 가지 음악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과, 그 두 가지 음악 형식에 흡사한 양식이 두 가지 문헌에 함께 전하는 것으로 보아, 3분절 형식과 5분절 형식이 선조 이전에 함께 연행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대엽의 4지 5지, 즉 시조의 종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음악적인 박자수가 많기 때문에 노랫말의 3분절성에도 불구하고 길어지게 된 것이고, 이 점도 가곡의 형식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 가곡창과 시조창은 시조를 얹어 노래 부르나, 그 음악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다르다. 시조창이 시조와 같이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분되나, 가곡창은 이를 오장으로 잘게 나누어 부르고, 전주(前奏)와 후주(後奏)에 해당하는 대여음과 간주(間奏)격인 중여음이 3장과 4장 사이에 있다. < 가곡 > <시조>
대여음(3장단5박)
초장 - 동창이 밝았느냐 - 초장
이장 - 노고지리 우지진다 -
삼장 - 소치는 아희놈은 - 중장
- 상긔아니 일었느냐 -
중여음(1장단)
사장 - 재너머 - 종장
오장 - 사래 긴밭을 언제 갈려 -
- 하느니 - (생략)
Ⅱ.시조 형성의 계층과 시기
1. 형성 시기
1) 삼국시대로 보는 견해
지금 전하는 시조 작품들 가운데는 乙巴素나 成忠 같은 삼국시대의 사람들이 지었다는 견해까지도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람들이 그런 작품을 남기려면 어떤 음악과 결합하여 이루어 졌는가와 기록할 문자가 없었으므로 구비문학적 전승의 탄탄한 장치가 설명되어야 한다. 혹 다른 경우와 같이 한시 또는 구전의 다른 음악과 결합되어 전승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후대의 첨삭 또는 번안이 예상되므로 시조 형식의 존재를 설명할 단서는 될 수 없을 것이다.
2)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는 문자의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시조창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구비전승의 방법에 의해 후대로 전승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것의 문자적 기록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서 <靑丘永言>의 가집만 하더라도 세간에 구비전승 되던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추론에 의하면 시조는 빠르면 고려 중엽, 늦으면 고려 말에 시조형식이 정제된 것으로 보게 된다.
3) 조선시대로 보는 견해
고려 말의 사람들이 썼다는 작품도 앞의 예들이 그러하듯이 한시나 다른 음악과 결부되어 전승되다가 시조시형이 정착되고 문자가 생겨났을 때 혹은 시조창이 완성 정제 되었을 때 비로소 변형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볼 경우, 시조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문학적 형식이나 음악적 형식이 정제되었다는 가설에 연결되게 된다.
세 가지 견해 중 일반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시조의 형성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첫째, 시조의 모태가 되는 형식적 연원이 고려 때의 음악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시조 작가가 대거 등장하는 시기는 앞서 말한 바대로 고려 말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시조 작가가 대거 등장한다는 사실은 시조 형식이 보편화 되었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2. 형성 계층
시조를 형성한 계층은 고려사회에 비판적이었던 지성, 신흥사대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것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문화의 새로운 흐름은 언제나 비판적 사고를 갖는 구성원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을 감안한다면, 시조도 고려 속요의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지성들에 의해 개척되었을 가능성 또한 큰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의 입론을 위해서는 몇 가지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고려시대의 가요에 비판적인 지성이어서 시조를 개척했다면 시조의 형식성이 고려가요의 형식에서 출발한다는 점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답은 형식적 모태로 삼는다는 것과 형식을 답습한다는 것은 다르다. 사실 시조는 3분절의 구조라는 점에서 고려가요 가운데서도 정격에 해당하는 것을 모태로 한다. 이러한 설명은 시조의 형식의 특성을 3장 구조의 단순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시조는 문학적으로 3분절이 확실하지만 그것의 창법은 반드시 3분절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가곡창으로도 불리었고 또 그것은 시조의 중요한 연행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조 형성의 계층이 신흥 사대부로 보는 다른 근거로 시조 작가인 정몽주, 이색, 우탁, 이도년 등이 실제로 비판적 지성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점은 바꾸어 그들 말고도 시조를 썼던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고 정치적인 현실은 그 시대에 대하여 동질성을 가질 때 추앙되는 것이며 기억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따라 비판적 지성인 신흥사대부계층이 시조형성의 계층이었다는 것은 더욱 확실성을 띠게 된다.
3. 연행(連行)의 관습
1) 연행의 시기
① 개인적이고 특별한 연희나 일반적인 술자리 또는 회갑 및 생일잔치 등의 연희에서 지어 지기도 하고 불리기도 했던 것이 관습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시조의 연행은 자 신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즐거움을 위한 목적이 선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들 엇더며 뎌런들 엇더리 이 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엇더리 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우리도 이갓치 얽어져 百 年지 누리리라.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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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16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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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5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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