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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시킴으로 말미암아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17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고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 18 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다마수스 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이다. “다마수스 당시 로마 관습과 보조를 맞추고자 하는 정책은 일정 한도까지 밀란의 앰브로스에 의해 촉진되었다.” 엠브로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을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우주적으로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 있게 미친 것은 아니었다.
3. 교황제도의 확립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 1세(Leo I : 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었다. 레오가 로마 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이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450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한,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레오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내며 탄성을 보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 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 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다. 레오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다.
레오 이후 영향력 있는 교황은 겔라시우스 1세(492-496)였다. 겔라시우스 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교황제도는 역사에 정착되었다.
제 17 장
초대교회 세계선교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Patrick
4세기에 접어들면서 복음은 로마주변의 야만족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서부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과 사도로 임명되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의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제도였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지방의 왕들과 속 왕들(sub-kings)에게 의탁하여 보호를 받았다. 아일랜드 귀족의 자제들의 그를 수행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는 사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얻었던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일찍이 패트릭과 콜럼바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방향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 콜러바(521-597)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속에서 자랐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역에 있는 아이오나(Iona)라는 작은 섬에 정착한 콜럼바는 동료들과 함께 이교도적 스코트인들과 픽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진 기지를 세웠다.
콜럼바의 영향력 아래 563년부터 597년 까지 35년동안 아이오나는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핵심지가 되었다. 콜럼바의 선고는 단순한 기독교인에로의 회심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았다. 당시 종족문제가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콜럼바는 575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데리 근처의 드럼시애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종족들의 국민 의회에 참석하여 고질적인 문제였던 고왕과 음영시인 들과의 분쟁을 중재하고 나섰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콜럼바와 그의 수도승은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심고 그와 함께 보다 큰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절도 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산시켜 주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선교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헌신적 삶을 통해 실천했던 콜럼바는 사랑하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작별의 축복을 한 후 597년 6월 9일, 주일날 이른시각에 평화로이 잠들었다.
제 18 장
결 론
지금까지 초대교회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지적하고 초대교회사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시대의 역사가 그렇듯이 초대교회 역사 역시 이전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또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셋째, 초대 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 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 전통, 그리고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절대 절망을 초극할 수 있게 만드는 절대 희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