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권의 성립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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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귀족사회의 동요
1. 이자의 및 이자겸의 반란
2. 서경파의 천도운동과 묘청의 반란

Ⅱ. 무신정변의 성립과 그 변천
1. 무신란의 발생
2. 무신정권의 추이와 그 성격
3. 무신정권의 권력기구

Ⅲ. 무신정권기의 경제와 사회

본문내용

: 최우가 조직한 군대였다.
결사대 또는 선봉대, 별동대와 같은 비슷한 의미의 군대.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형성된 부대였다. 마별초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별초(別抄)라고 불리는 군인들이 있었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특별히 가려 뽑은 군대 즉 특선병대(特選兵隊) 의 뜻이다. 전투에서 흔히 선봉에서는 용감한 군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우의 가병의 일부분으로 기병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상대되는 도방은 보병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것은 최우의 힘이 한층 강화됐음을 의미한다.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Ⅲ. 무신정권기의 경제와 사회
■ 田柴科체제의 붕괴
전시과체제는 10세기 후반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 그런 대로 유지되었다. 관리들은 국가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수조지(收租地)를 분배받았고, 정부의 각 기관들 역시 토지를 배정 받아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은 자기의 소유지인 민전의 자가경영을 통해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조세를 납부하여 녹봉과 국용(國用) 및 군유 등을 지탱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12세기 초부터 붕괴의 양상을 보이더니 무신정권이 들어서 부터는 아예 파탄의 길을 걷게되었다. 전시과체제의 모순점으로서 우선 양반관료에게 지급할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가 부족하였다. 원래 분급지는 납공(納公) 해야하는 원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음전시나 사전과 같이 실제적으로는 사유지나 다름없는 토지가 계속 지급되어 그 같은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자겸의 집권과 그의 반란을 전후한 혼란기에 권력자들의 토지 탈점(奪占)이 진행되어 전시과체제가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권세가(무신), 토호, 승려들도 탈점자로 나서고 그 대상 역시 민전은 말할 것도 없고 양반전, 군인전 등 공, 사전 모두에 미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탈점 겸병에 의해 집적된 토지는 농장의 형태로써 지배, 경영되었고 중앙, 지방의 공전·사전이 위에 언급했듯이 권력자들에 의하여 탈점을 당한 결과 자영농민은 몰락하게 되었고, 자영농을 토대로 해오던 국가의 재정수입은 현저히 감소되게 되었다.
사회의 혼란으로 민란과 노비들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무신집권기의 광범위한 피지배층의 항쟁에는 단지 농민, 천민, 노예들만이 가담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 가까운 향리·토호 등도 상당수가 이에 호응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지방관은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부유하나 중앙과 연계된 권세가 없는 토호들에 대한 수탈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이 서북민의 항쟁이나 경주와 청주민의 봉기에서 토호 등 향리층이 광범위하게 가담했던 원인이 되었다. 경주민의 항쟁에서는 정치권에서 소외된 관인층인 동정직 소유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고 민란의 또 다른 요소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천민들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무신정권기에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문란해진 데다가 그와 관련하여 피지배 신분층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원래 고려는 귀족·양민·천인 등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사회로서 신분제도는 상층신분인 문신귀족이 정권을 차지하였던 문벌귀족 정치기에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실제로 무신란 이후에는 하극상의 풍조가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하여 종래의 엄격했던 신분질서는 동요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보잘것없는 신분 출신의 무인으로서 크게 출세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천민들로 하여금 재래의 신분제에 대한 관념을 변모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지위 상승 의욕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새로운 집권자로 등장한 무인들의 가문이 대개 미천하였으므로 이전의 엄격한 신분질서는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즉, 피지배층은 신분이란 태어나면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도 있고, 또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민중들은 정권을 잡고 있는 집정자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신분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무인집권기의 민란이 농민의 반란 뿐 아니라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노예, 천민의 봉기도 두드러진 것은 이는 바로 신분질서의 붕괴에 따른 신분관념의 변화가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농민, 천민의 항쟁은 초기에는 단순히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항거로 출발하였으나, 그들이 항거하는 과정에서 점차 의식의 각성을 가져와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자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시대사』 박용운 일지사
『고려시대사강의』 한국중세학회 늘함께
『고려무인정권연구』 민병하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6.06.07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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